건흥 6년(228년) 봄, 야곡도(斜谷道)를 거쳐 미(郿- 우부풍 미현)를 취하려 한다고 양성(揚聲-일부러 소문냄)하고 조운, 등지를 의군(疑軍-속이는 군사)으로 삼아 기곡(箕谷)을 점거하게 하자, 위(魏)의 대장군 조진(曹眞)이 군을 이끌고 이를 막았다. 제갈량 자신은 제군(諸軍)을 이끌고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융진(戎陳-군진)이 정제(整齊-정돈되어 가지런함)되어 있고, 상벌이 엄숙하며 호령(號令)이 분명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安定) 세 군(郡)이 위(魏)를 배반하고 제갈량에 호응하니 관중(關中)이 진동했다. (주17)
(주17) [위략]魏略 – 당초, 국가(國家-위나라)에서는 촉(蜀) 중에 오직 유비만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비가 이미 죽고 여러 해 동안 조용하고 아무 소리가 없었으므로 거의 아무런 방비가 없었다. 그러다가 돌연 제갈량이 출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야(朝野)에서 몹시 두려워하고 농우(隴-농서), 기산(祁山)에서 특히 심했으니 이 때문에 세 군(郡)이 동시에 제갈량에게 호응했다.
위(魏) 명제(明帝)는 서쪽으로 장안을 진수하고 장합에게 명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선두에서 제군을 이끌게 해 가정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제갈량은 서현(西縣-천수군 서현)의 천여 가(家)를 뽑아 한중으로 되돌아오고 마속을 죽여 군사들에게 사죄했다. - 제갈량전
건흥(建興) 6년, 참군(參軍) 마속에게 소속되어 선봉이 되었다. 마속은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였으므로 왕평은 계속 마속에게 규간(規諫)하였으나 마속이 이를 쓰지 못하여 가정(街亭)에서 크게 패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산산이 흩어졌으나 오직 왕평이 거느리고 있던 1천명은 북을 울리며 제 자리를 지키니 위나라 장수 장합은 그곳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접근하지 못하였다. - 왕평전
제갈량이 기산으로 출병하자(228년의 일) 장합에 특진(特進)의 지위를 더하고 제군을 이끌게 해 파견했고, 제갈량의 장수인 마속과 가정(街亭)에서 맞붙었다.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은 그 급도(汲道-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군(安定郡)이 모반해 제갈량에 호응했었는데, 장합이 이를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 장합전
건흥 6년, 제갈량이 군대를 출정시켜 기산(祁山)으로 향했는데 당시 숙장(宿將)인 위연, 오일(吳壹) 등이 있어 논자들은 마땅히 그들을 선봉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나, 제갈량은 뭇 의견을 거스르고 마속을 발탁하여 대군을 통솔하여 선두에 서게 하였다. 위의 장수 장합(張郃)과 가정에서 싸웠으나, 장합에게 격파되고 병사들은 흩어졌다. 제갈량은 진군하려 해도 거점이 될 곳이 없어 군대를 퇴각시켜 한중으로 돌아왔다. 마속은 하옥되어 죽었다(物故). - 마속전
이릉전투 이후에 준비기간만 5년이 걸린데다 적의 경계마저도 허술할때를 노린 작전이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허망하게 끝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