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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2/04/04 19:05:15 |
Name |
PoeticWolf |
Subject |
그녀의 속살 보기 |
“내 속살, 보고 싶어?”
퇴근 후 저녁을 함께 먹던 중 녀석의 갑작스런 질문에 총각의 가슴이 공이질을 시작했다. 응, 이라고 하자니 너무 다급해보이겠고, 아니, 라고 하자니 여자의 대단한 호의와 자존심을 무자비하게 밟는 것은 사내로서 할 짓이 아니다. 여자를 보호하면서도 수컷의 목적을 이룰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난 지금 당장은 머리 속이 하얗다. 주위에서 그릇 달그락 거리던 소리들도 한꺼번에 없어졌다. 시간을 끌기로 했다.
“...뭐?”
계산된 놀람이었다. 기침을 한다든지 물을 벌컥 들이키는 건 너무 순진해보일 수 있고, 가볍게 받아치면 너무 능글맞아 보이니 중간 정도의 수치로 볼륨과 억양을 조절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끊임없이 궁극의 대답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녹녹치 않은 녀석, 내가 시간을 실컷 벌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 곧바로 대꾸가 날아왔다.
“다 들었으면서.”
눈을 들어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직전에 우리는 어떤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를 떠올렸다. 어떤 맥락 속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지를 파악해 녀석의 의중을 잡아내고자 한 것이다. 진짜로 은밀한 여자의 속살을 보여주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는 질문인지, 사양이 낮은 남자란 종자가 딴에 머리 굴리려 노력하는 꼴이 보고 싶은 업그레이드 인종의 우월 의식인지 파악해야 했던 것이다. 시간을 한 번 더 끌 필요가 있었다.
“아니, 진짜 못 들었어.”
시치미를 잘 떼야 한다. 다른 곳에 정신을 잠시 팔았다가 되돌아온 듯, 눈을 크게 뜨고 당당하게, 그러나 대화 중 한눈을 팔아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계속 대화를 거슬러 추적하고 있었다. 방금 전 우리 대화는 어디서 끝났더라. 아, 그래, 우리 미래 가정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 어떤 가정을 만들고 싶은지 서로 나눴었다. 뭐였더라. 맞은 편에서 녀석이 내가 정말 못들은 건지 판단하려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날 쳐다보고 있다.
‘그냥 살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같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어.’
생각났다. 그게 녀석의 꿈이었다. 녀석은 가끔 이상주의자 같은 말을 했다. 내 지갑 관리는 벌써부터 마누라처럼 엄격하게 하면서 눈은 항상 아득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미 있는 일이란 게 뭘까, 난 물었었다. 이상은 구체적이지 않은 법, 당연히 녀석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연히 결혼할 사람과 같이 찾아야 한다고,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듯이 내게 말했었다.
‘그래? 의미 있는 일이 뭔가부터 정의해야겠네? 공익에 관련된 일인가?’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었다. 여자에게는 공감해주고 들어주기만 하는 상대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남자는 본능상 해결사가 되어야 하므로 난 녀석의 역사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생각하는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녀석이 자란 환경과 개인의 역사 안에 들어 있을 것이라는 걸 내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의미를 찾고, 그 찾은 의미는 성장의 단계마다 바뀌니까. 과거사 이야기가 오고 갔었다. 그러나 짧은 몇 마디로 어찌 사람의 역사를 다 파악하랴. 조금 캐는 시늉을 하다가 그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기는 포기하고 교과서적인 결론으로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었었다. 어차피 난 녀석과 이미 결혼도 생각하고 있다. 당장 뭔가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은 우리 앞에 많이 있다.
‘우리가 먼저 화목해야겠지?’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는 가정은 둘의 성격상 불가능해 보인다고 했다. 이혼의 가장 큰 이유는 싸우고 화해하는 법을 몰라서라며, 싸울 때마다 더 깊은 속살을 아는 게 더 중요하다고, 어딘가 결혼 생활 상담서 같은 책자에 나올 법한 말을 했었었다. 분명 다툼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렸을 때부터 잠재되어 있던 상처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다툼마저 더 깊고 끈끈한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럴듯한 설교를 했다.
‘그런데 난 오빠가 자꾸 이민가려는 게 불편해. 난 한국 좋은데.’
그건 네가 아직 한국 사회를 잘 몰라서 그런다고 대꾸를 했었다. 교육 환경만 생각해보라고,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상상해보라고 했었다. 내 야근 기록을 보라고 했었다. 상대편 죽이려드는 정치판 뉴스만 봐도 끔찍하지 않냐고 했었다.
‘그래도 봐, 여기까지 살아 남았잖아. 그런 한국이 대견하지 않아? 난 역사 자체를 믿어. 어느 지도자 하나, 정책 하나에 좌지우지될 나라가 아니야. 지금 이렇게 다들 싸워도 결국 서로 더 깊은 나라의 속살을 알게 될 거야.’
이런 태평한 녀석, 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럴듯했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굵은 흐름을 믿어보겠다는 녀석의 눈에 당장의 혼란함에 뭐 하나 이상적으로 바꾸지 못하니 외국으로 도망가자는 내 말이 얼마나 비겁하게 보였을까. 나도 이 녀석과의 대화 속에서 몇 번이나 대화의 맥락과 녀석의 역사를 기웃거리지 않았는가. 그건 녀석과 나의 미래 관계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믿음을 전제로 한 것 아니었는가. 단순하지만 분명한 녀석의 말에 하루 종일 우울한 뉴스만 접한 머리가 허무해졌었다.
아, 속살! 거기서 그 말이 나왔었구나! 벌써 다투고 화해하는 과정 중에 서로의 속내를 가감없이 드러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녀석은 아직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나보다. 그렇다면 속살을 보겠냐는 질문은, 여자로서 엄청난 결심을 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다. 오늘 나 계 탄 날이로구나.
“속살, 보고 싶어?”
“...지금?”
“응. 지금, 여기서.”
“사실 나... 음... 거 참...”
“보고 싶잖아. 솔직히 말해.”
“솔직히, 나 아직 젊은 남자고...”
“알아 들었어. 눈 감아봐.”
눈을 감았다. 준비가 됐는지 녀석이 눈을 뜨라고 했다. 녀석은 눈웃음 지으며 혀를 내밀고 있었다. 메롱?
“자, 여기 혀! 속살!”
'이건 픽션이야...'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4-18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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