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7/03/02 13:24:18
Name 초코머핀~*
Subject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새벽에 설풋 잠에서 깨었다가 문득 비가 오는 듯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창문 밖으로 타닥타닥 빗방울이 부딛쳐오는 소리를 들으며
왠지 모르게 허전한 기분이 들더군요.
출근 준비를 하면서 거울 속의 나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나를 미치게 하는 건 헤어진 사람을 못 잊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는 나를 깨닫는 것도 아닌,
일상에서 아무런 준비없이 문득문득 그 사람을 떠올리게 만드는 기억들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악성피부암을 앓고 있는 그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이면 조심해야 합니다.
비가 와서 대기에 수증기가 많아지고 기압이 올라가면
미처 제거하지 못 하고 수포처럼 남아있는 암세포들이 터져서
출혈이 되기도 하거든요.
물론 전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6개월여 동안 짧게 알았고, 그 중 100일 남짓을 사귀었을 뿐인
장거리연애에 연상연하 커플이었던 우린 결국 서로에 대한 높은 이해의 벽을
넘지 못 하고 헤어졌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시절, 가장 좋아하던 국어 선생님께서 이런 구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예전의 것이 아니리라.]

온라인에서 만난 우린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요건들을
한아름 껴안고 시작했습니다.
남자와 여자, 연상연하, 학생과 직장인, 서울과 대전이라는 물리적 거리.
말 그대로 서로 모니터를 두고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만나다 보니
하나씩 눈에 들어오더군요.
혹여나 누군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싶어 손 한번 제대로 잡아주지 않음,
6개월이 넘게 알아오면서 내 핸드폰 번호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 하는 무신경함,
날씨가 좋으니 놀러가자는 내 말은 귀찮다고 무시하더니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는 10시간 넘게 겜방에서 게임만 한다던 말에 느낀 서운함,
이 모든 게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초라한 그 짧은 연애기간동안 한꺼번에 날아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것도 자기의 방식이라며 그렇게밖에 못 해주는 자기를
이해해달라고 했지만, 글쎄요.
그 사람이 절 만나면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듯이,
저 역시 그 사람을 만나면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은 자기가 더 어리다는 이유로 생각하지 못 하는 것 같았습니다.




연예인들의 비보와 최근 본좌 논쟁에 시달리고 있는 마재윤 선수를 보면서
다르지만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자는 악플과 비방과 비판을 모두 '관심'이라고 말합니다.
관심받고 있고, 주목받고 있기 때문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물이라고요.
네, 그럴 수 있습니다.
관심받지 못 하고 인기없다면 악플도, 비방도, 비판도 없겠죠.
이제는 악플에 초연해졌다며 오히려 그들이 있어 자기가 더 강해질 수 있었다고
감사하다는 이윤열 선수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간 이윤열 선수가 받았을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짐작했습니다.
사실 직접 대면하지 않는다면 당사자의 마음에 난 스크래치를 다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릅니다.
감정의 이입이 아무리 깊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본인과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사랑'은 단순히 남녀간의 연애만을 일컫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나와 다른 모든 사람과의 우호적 감정교류를 대신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분위기에 휩쓸려 재미삼아 악플과 비방을 일삼는 사람도 있겠지만
관심과 사랑의 눈으로 '비판'하려는 눈길도 있습니다.
바램같아서는 이 세상 모든 게시글과 댓글들이 사랑인 관심으로 작성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마음과 달라 녹록치만은 않죠.
pgr은 게임에 대한 사랑을 지니신 분들이 계신 곳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
게임과 선수와 리그에 대한 관심이 우리를 이 곳에 모이게 만들었습니다.
선수들의 멋진 경기들을 보면서 게임에 대한 이해를 높여 나갔습니다.
경기 후 남겨진 데이터들과 그에 대한 분석 또한 이해와 관심의 바탕이 됩니다.



사랑은 지나치면 집착이 됩니다.
나에게는 사랑일지 모르지만 상대에게는 스토킹인 것처럼 관심과 사랑이 변질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아는 만큼, 가해야 한다면 비판을,
그리고 비판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에 대해 내가 얼마만큼 아는가를.
사실은 왕복 2차선인 길을 할루시네이션에 의해 왕복 8차선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가를,
혹은 그 반대인 것은 아닌가를.
나는 이것이 스티로폼으로 만든 가짜 돌멩이라고 보고 던졌는데
다른 사람이나 맞은 당사자에게는 다이아몬드 비수는 아니었는지,
나에게는 사랑이었지만 그에게는 괴로움이었던 것은 아닌지.
사랑하기에 더욱 알고 싶어지는 것은 사람의 당연한 본능이겠지만
알면 알수록 내가 꿈꾸던 이상과 달라지는 것 역시 현실이란 것을
모른척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 일상의 사랑은 끝났습니다.
사랑하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졌고 알아갈수록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면들을 알게 되면서 결국은 그 괴리를 포용하지 못 한 채 그렇게 끝났습니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 대한, e-sports라는 세계에 대한,
그 안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은 어떤 모습입니까?
여러분들의 기준으로 한순간 그들에 대해 상처주는 말을 내뱉지는 않았나요?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을 무기삼아 그들에게 돌은 던진 적은 없으십니까?
저요?
저라고 깨끗하다는 건 아닙니다.
저 역시 제가 응원하는 선수와 팀이 기대한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혹은 화면에 대고 짧게 육두문자를 써줄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공개석상이라면 한숨 한 번 쉬고, 생각 한 번 더 하고,
고민 한 번 해보고 고치기를 수없이 합니다.
왜냐고요?
혹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면 어떡해야 하나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하십니까?
그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비틀린 시각이 아닌 애정어린 회초리를 들이댈 수 있는 손을 보여주십시오.
그들은 영웅이지만 신은 아닙니다.




* anistar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3-05 12:07)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이직신
07/03/02 15:05
수정 아이콘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사는 이곳에서도 비가오네요.
글을 읽으면서 좋아하는 사람이 계속 아른거려서 괜히 눈물이 핑 도네요.
이제 이틀후면 대학교 때문에 먼곳으로 가는데... 제 마음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떠나는게 후회가 되네요. 거기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정말 제 모든걸 보여주고싶습니다.
키스!!
07/03/02 15:43
수정 아이콘
너무나 와닿는 글입니다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어요
마음 한편이 아파오네요
07/03/02 16:57
수정 아이콘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 나름 유명한 말이었죠. 유홍준 문화제청장님의 우리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오는 걸로 압니다.. 더 거슬러는 조선시대 어느 선비가 했던 말이라고 하는데.. 물론 이 '사랑' 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학문에 대한 열정...을 뜻하는 거지만 말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사회불만세력
07/03/02 22:15
수정 아이콘
유한준 입니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원문은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zenocide
07/03/05 13:20
수정 아이콘
정말..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을까요?

영원한것은 없다는게.. 또 슬퍼지네요 ^^
07/03/05 14:2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higher templar
07/03/05 14:26
수정 아이콘
영원이라는 정의 자체가 이미 좀 그렇죠. 저희가 영원하지 않은데 저희가 인식하는 뭔가가 영원한지 영원하지 않은지 판단하기도 어렵죠...

그리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은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는 이야기니 기뻐하셔야 할거에요^^
honnysun
07/03/05 16:0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초코머핀~*
07/03/05 23:34
수정 아이콘
싸이 투데이를 보고 '뭔 일 있었나...' 했는데..게시물이 옮겨왔군요^-^; 부족한 글을 봐주신 모든 분들과 운영진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07/03/05 23:55
수정 아이콘
날씨 때문에 왠지 슬픈 분위기가 느껴지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일상다반사
07/03/06 10:3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자신의 의견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일이 전혀 가치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좀 더 부드럽게 이야기하고 설득하는 방법을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네요.

비판을 하더라도, 악의적인 비난이 아닌 애정이 담긴, 듣는 이의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이 담긴 비판을 해야겠습니다.^^
하얀조약돌
07/03/06 13:0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 합니다.^^
깊은 공감대가 느껴 집니다...
(무엇보다 연상,연하와 직장인,학생인 부분에서요,.,ㅡㅜ)
구경만1년
07/03/08 04:47
수정 아이콘
자주 글 남겨주시기로 하셨습니다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489 난 동족전이 좋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26] Zwei9323 07/04/18 9323
488 "이 멋진 세계로 나를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15] 네로울프11202 07/04/15 11202
487 FP를 이용한 게임단 평가입니다. [19] ClassicMild9576 07/04/14 9576
486 허영무. 부지런함의 미학. [19] 김성수14561 07/04/03 14561
485 3인의 무사 - 오영종, 박지호, 김택용 [20] 나주임10694 07/04/02 10694
484 양방송사 개인대회 순위포인트를 통한 '랭킹' [27] 信主NISSI12413 07/04/01 12413
483 FP(Force Point) - 선수들의 포스를 측정해 보자! [40] ClassicMild11552 07/04/01 11552
482 김택용 빌드의 비밀 [42] 체념토스18678 07/03/31 18678
481 광통령, 그리고 어느 반란군 지도자의 이야기 (3) - 끝 [35] 글곰11207 07/03/11 11207
480 [추리소설] 협회와 IEG는 중계권에 대해서 얼마나 준비를 했을까? [40] 스갤칼럼가12510 07/03/10 12510
479 쉬어 가는 글 – PGR, 피지알러들에 대한 믿음2, 그리고… [20] probe9452 07/03/08 9452
478 드라마 [9] 공룡9300 07/03/05 9300
477 마에스트로의 지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35] 연아짱17784 07/03/05 17784
476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13] 초코머핀~*11741 07/03/02 11741
475 MSL 결승전에 대한 짧은 분석. [3] JokeR_11381 07/03/04 11381
474 일주일의 드라마 - StarCraft League, Must Go On. [4] The xian8810 07/03/04 8810
473 [설레발] 광통령, 그리고 어느 반란군 지도자의 이야기 (2) [30] 글곰11828 07/03/03 11828
472 최연성과 마재윤은 닮았다. [17] seed12291 07/03/02 12291
471 마재윤선수의 '뮤탈 7마리' (in Longinus2) [48] 체념토스18541 07/02/28 18541
470 잃어버린 낭만을 회고하며... 가림토 김동수 [21] 옹정^^10576 07/02/27 10576
469 임요환의 패러다임 그리고 마재윤의 패러다임 [20] 사탕한봉지11911 07/02/27 11911
467 제 관점에서 바라본, 마재윤의 테란전 운영 [27] A.COLE13365 07/02/25 13365
466 마재윤을 낚은 진영수의 나악시 두번 [30] 김연우15427 07/02/25 1542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