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렇게 스물둘의 초여름날은 지나가고 있었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휴가동안 나는 나대로,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나름의 스케쥴이 있어
더는 얼굴을 보지 못하였고, 다음 휴가때 보자는 기약으로 아쉬움을 남기고 휴가 복귀를 했다. 하지만 다음 휴가때 그 아이를 보는 일은 없었다.
#8
입대를 하기 전에도 무척이나 상황이 나빴다고 기억을 하는데, 전역을 하고 나니 그런 상황들이 피부로 직접 느껴졌다.
말차를 나오자마자 공장에 취직해 열흘 하고도 사나흘동안 일을 했고, 전역신고를 하기 위해 잠깐 휴가를 낸 며칠을 빼고서는 쉴틈없이 일을 했다.
사용했던 핸드폰도 굳이 필요가 없겠다싶어 해지해버렸고
공장일을 하다가 팔꿈치를 심하게 다쳐 관두게 되고 일주일 가량을 쉬다가 택배일을 시작했다.
서너달동안 교통비를 제외하고서는 십만원도 채 안되는 돈으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너무 배가 고팠고 잠이 모자랐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근처 대학병원의 약제부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금보다 훨씬 높은 월급과 비교적 수월한 업무가 매력적으로 느껴져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봤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지만 약제부장은 근로학생 가운데에 그렇게 간절한 눈빛을 가진 학생은 처음이였다고 했다.
그렇게 내 인생의 한 획을 긋게 된 경북대학교병원 약제부 조제파트 야간 근로학생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9
면접을 보고 이틀동안의 유예기간이 생겼다.
그간 일했던 택배회사에 찾아가 함께 일한 작업소장이나 알바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거하게 피자를 한턱 쐈다.
다들 나에게 잘 풀릴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까지 독하게 마음 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며
나를 다독이며 언젠가 술이나 한잔하자고들 했다. 왠지 짠했다.
고작 몇 달뿐이였지만 하늘이 내 뜻을 알았는지 일이 잘 풀려갔다.
대학을 다닐동안 내게 빚을 졌던 동기와 연락이 닿았는데, 어디서 내 사정을 들었는지
아는 사람에게서 스마트폰을 구해다가 줬다. 나는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정작 친구로부터 힘내란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맥이 빠지는 기분이였다.
나만 이렇게 힘든건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내고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네 달만에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기뻤었던 것 같다.
집과 가족의 번호를 저장하고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불알친구들의 번호 또한 저장했다.
또 누굴 저장해야할까 한참을 생각하는데 번뜻 스쳐지나가는 번호가 있었다.
연락을 해도 되는걸까, 잠시 망설였다. 차곡차곡 쌓여간 통장잔고를 대신해 잃어버린 마음의 여유가 혹시나 폐가 되진 않을까 싶었다.
몇 번이나 전송 버튼을 누를까말까 망설였다.
나는 이상한데서 용기가 없다는걸 그때 어렴풋이 느꼈는데, 이런 비겁함이 우리 관계에 그다지도 역겨운 영향을 끼치게 될줄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4부에 계속
죄송합니다 일일 한편씩 올리려고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 분량이 짧네요. 5부 혹은 6부쯤 완결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15 06:42)
* 관리사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