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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05 02:40
철원이 사실 교통의 요지이긴 하죠. 6.25 전쟁때도 이곳을 점령하기 위한 전투가 많았듯이..농경지도 제법 발달해있구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쳤기 때문에 도읍을 그곳으로 정한 게 아닐까 싶슾셒슾..
13/01/05 02:41
그리고 철원이 춥다는 것도, 기상관측을 철원에서 좀 추운쪽에서 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울도 종로쪽에서 쟀을 때와 한강쪽에서 쟀을 때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들었구요.
13/01/05 02:47
원래 후고구려는 패서지역 호족과 양길의 세력을 흡수한 궁예에게 딜을 한 연합국가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패서지역 호족의 딸인 강씨를 황후에 앉히기도 했고 패서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호족 중 하나인 왕건을 궁예의 오른팔로 쓰기도 했습니다. 근데 점차 패서지역과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궁예쪽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패서지역 호족이 맘에 안 들기 시작한거죠. 이때 등장한 것이 아지태입니다. 궁예는 아지태를 맘에 들어했고 패서지역 호족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아지태를 비롯한 청주호족들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카드가 태봉으로 국명을 바꾸며 철원 천도였습니다. 이로 인해 패서지역 호족은 상당한 타격을 입은 셈이죠. 애초에 약조했던 고구려 땅을 수복한다는 것과 패서 호족들을 중하게 쓴다는 것이 모두 날아간거니까요.
13/01/05 07:55
후삼국 중 하나인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신라 왕실에서 태어났지만 축복받지 못했다. 그가 불길하다면서 죽이려고 내던지자 젖먹이던 종이 몰래 받다가 잘못해서 그만 눈을 다치게 하여 한쪽 눈이 멀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쳐 힘들게 키웠다.
그 후 궁예는 강원도 영월로 가서 승려가 되어 지내다 농민반란 이후 원주를 기반으로 반란군을 이끄는 양길의 부하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궁예는 탁월한 통솔력을 보였고, 철원을 기반으로 독립하여 세력을 이끌자 가난한 농민들이 열렬히 지지하였다. 궁예는 세력을 넓히기 위해 서해안지역에서 해상무역으로 거부가 된 송악지방의 왕건가와 손을 잡았다. 견훤이 백제를 잇는 후백제를 건설하자 궁예도 고구려를 잇겠다는 뜻으로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후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견훤이 세운 나라는 보통 후고구려라고 부른다. -이글에서 보셨듯이 후삼국시대는 호족들의 시대라 지역기반이 없이는 전제왕권을 세우려던 궁예의 꿈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역기반인 철원으로 천도했던 것이고요. 철원은 꽤 큰 평야가 있었고 농업기술력이 발달하지 않은 고려시대엔 지역기반으로서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물론 도읍지로서 최적의 곳인지는 의문이지만(그리고 그렇지 못하다는게 판명이 났지만) 지리적으로는 한반도의 정중앙이라고 합니다.
13/01/05 08:16
그 당시에는 춥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기후라는게 계속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던 시기엔 그린란드에 바이킹들이 대거 이주하고는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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