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타는 '성공한 오타쿠'라고도 불린다. 케이팝을 많이 좋아했던 소년이 실제로 케이팝 아이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이라이트나 틴탑의 팬이었던 것이나, 일본에서 K-POP 커버 댄스 기반의 댄스 보컬 유닛 "가라가라헤비"로 활동했던 과거에도 포커스가 집중됐다. 그러나 그가 이 성공 스토리를 잡기까지는 상상을 초월한 과거가 있었다.
<켄타, 케이팝(K-POP)과의 만남은 어느 날 갑자기... 원래는 "개그맨이 되고 싶었다">
Q) 가장 먼저 케이팝에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켄) 고교 1학년 때 YouTube에서 우연히 발견했어요. 관련 영상이라고 있잖아요. 거기 여러 K-POP 그룹분들의 동영상이 나왔어요. 보고나니 너무 멋있는 무대여서 너무 흥미가 생겼어요. 사실 원래 전 개그맨이 되고 싶었는데요(웃음) 개그맨이 되려고 준비하던 시기에 케이팝을 만나서 그때부터 댄스를 시작했어요.
Q) 원래 연예계에는 관심이 많았군요.
켄) 글쎄요.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는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사람들 앞에 나가서 반 친구들도 웃기고 다들 웃는걸 보는걸 좋아했어요. 좋은 타이밍에 케이팝을 만나서 여기까지 왔는데, 혹시 만나지 않았다면 일본에서 개그맨을 했을지도 모르겠네요(웃음).
Q) 고등학생 때부터 케이팝 커버댄스를 하셨죠?
켄) K-POP에 흥미를 가졌을 때, 커버 댄스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춤은 그때까지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커버댄스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역시 댄스 교실에 다니면, 경제적인 면도 그렇고 발을 들여놓기 힘든 부분이 좀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버 댄스라면 취미로서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 해 본 것이 계기입니다.
Q) 고향인 군마에서 했었습니까?
켄) 도쿄입니다.주말은 군마에서 도쿄로 나오고, 평일은 고등 학교에 다니며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는 생활을 2년 정도 계속 했습니다.
Q) 도쿄로 가는 교통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켄) 그렇네요. 부모님에게는 계속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숨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매주 "친구집에서 자고 오겠다"면서 도쿄에 다녀오곤 했었습니다. 그러니 돈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죠.
Q) 대단한 열의네요.
켄) 하지만 K-POP이라는 존재가 그만큼 컸네요.꿈을 키워줬어요. 정말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그 곳에서 더 커졌거든요.
Q) K-POP 커버 댄스계에서는 유명한 댄스그룹에 소속되어 있었죠? 그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켄) 처음에는 트위터를 통해서 팀을 같이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오더군요. 기간 한정 그룹 차원에서 한 두번 행사를 위해 모인다는 느낌으로 시작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이대로 해볼까"라고. 그래서 커버댄스의 그룹으로 시작해 자신들의 오리지날곡을 만들어, 지하 아이돌과 같은 느낌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Q) 부모님께는?
켄) 고등학생 때는 계속 비밀로 했숩니다만, 고3때 진로를 정할 때 "사실 저는 지금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그곳에서 처음 말씀드렸죠. 가능한 한 지원해 주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후로는 이벤트 같은 것이 있으면 굉장히 응원해 주셨네요.
<켄타, 운명적인 한 마디에 한국행 결심>
Q) 한국에 진출하고자 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켄) 지하 아이돌과 같은 활동을 하면서도, 병행해서 K-POP 커버 댄스는 쭉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한국에서 하는 K-POP 커버댄스 이벤트에 나가게 되어 서울에 갔습니다. 그 때 당시 그룹의 리더위 친구로 한국에서 데뷔하신 분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역시 나도 고민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하며 상담했던 건데 그 분이 "한 번 해 보면 어때? 한국에 와보면?" 이라고 말해 주셨어요. 그 한마디였죠. 그 말을 듣고 '아, 해보자.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 타이밍을 놓치면 아마 안될 것 같다고.
그때부턴 그룹도 그만두고, 8개월 정도 아침 낮에 계속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그래서 한국에 간 거예요. 딱 20세가 끝날 때였죠. 20세랑 21세는 뭔가 다르잖아요. 21세가 넘으면 무리다 이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다고 생각해서, 2015년 12월 29일에 갔습니다. 이 해가 끝나기 전에 꼭 가려고.
Q)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셨나요?
켄) 한국에 가고 싶어요 라고 했을 때는 역시 반대하셨죠. "돈은 어떻게 할거니?" 라던지. 우리 집은 부유하지 않아서 걱정인 부분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 만큼의 열정이 있고, 정말로 이 꿈을 이루고 싶어서 가는 것' 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갔다 와. 성공할 때까지 돌아오지 말도록" 이라고 마지막에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말도 모르는 채로 매주 오디션에>
Q) 그쪽에는 뭔가가 있었습니까?
켄) 아뇨, 정말 돈과 마음만 가지고 간 거예요. 아무런 연줄도 없고 살 곳도 없어서 고시원이라는 2장짜리(다다미 2장 크기) 방 하나에 샤워실도 공동인 하숙소에 살며 거기서부터 소속사를 찾았습니다.
Q) 굉장한 용기네요.
켄) 하지만 그때는 두근거림이 더 컸어요.걱정이라든가 하나도 없어서, "빨리 가서 빨리 하고 싶다!"라고 하는 기분이 더 컸습니다.
Q) 소속사에 들어갈 때까지는 어떤 생활을.
켄) 처음에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으니 우선은 어학원에 2달 동안 기본을 배우러 갔습니다. 학원을 다니면서 대부분 소속사들이 주말에 오디션을 보기 때문에 여러 곳에 매주 보러 다녔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까 얘기했던 한국에 와보면 어때 라고 말했던 선배가 우리 사무실에 와서 같이 춤을 추자고 해서 놀러갔다가 그 소속사 오디션을 본 거예요. 그게 지금 소속사예요.
<출구 없는 터널... 가혹한 연습생 생활>
Q) 한국에서 연예기획사 소속으로 언제 데뷔할 수 있을지 모르는 연습생 생활이 시작되죠.역시 일본에서의 활동 때와 한국에서의 연습생으로서의 생활은 달랐습니까?
켄) 달랐네요. 역시 연습생은 하루 종일 연습밖에 하지 않고 끝이 보이지 않고 정말 불안과의 싸움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라면 말도 통하고, 부모님도 있고, 뭔가 진짜 곤란하면 본집에 가면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저쪽에서는 그렇게 안 되잖아요. 해외고, 친구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내가 다 해야할 상황이라서 고민도 많았어요. 하지만 좋은 경험이 되었네요.
Q) 연습생이 되고 나서 PRODUCE 101시즌 2에 나오기까지 얼마나 걸렸죠?
켄) 1년과 2-3개월이 지났네요. 그 동안 계속 연습생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Q) 당시에는 뭐가 가장 힘들었나요?
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이에요. 정말 출구 없는 터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열심히 연습해도 성과가 안보인다거나 하면, 자신도 없어져 버리거나, 기분적으로도 침체해 버리거나 한다던가. 나머지는 돈의 면에서도 고생했어요. 밥을 살 돈이 없어서, 고시원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쌀밥과 김치를 제공하는데, 1주일 꼬박 쌀밥과 김치만으로 생활한 때가 있어요. 그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정말 힘들었네요.
<"이제 무리일지도..."순간 PRODUCE 101시즌 2에서 보인 빛>
Q) 그 상황에서 "PRODUCE 101시즌 2"출연이 정해진 거네요.
켄) 사실은, "이제 무리일지도"라고 생각해서 일단 일본에 돌아가, 정리를 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가서 1년이 지나면 더 이상 돈 없고, 정신적으로도 무리한 게 아닌가. 일주일 정도 돌아왔었는데요, "라스트 3개월만 가보고"라는 생각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에 마침"PRODUCE 101시즌 2"의 얘기를 들었죠. 그래서 회사에 나가고 싶다고 해서 오디션을 보고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Q) 스스로 나가고 싶다고 하셨죠.
켄) 맞아요. 전년에 방영됐던 PRODUCE 101의 남자판이 한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사무소에 "절대 나가고 싶습니다. 안나가면 안되요"라며 오디션을 보러 갔습니다.
Q) PRODUCE 101시즌 2은 너무 가혹한 프로그램이죠. 뭐가 제일 힘들었나요?
켄) 제일 처음 시기였네요. 나야나(Pick Me)라고 전체가 함께 춤추는 타이틀곡을 연습했을 때 너무 힘들었어요. 첫 녹화에서 꼬박 3일 정도는 거의 수면 시간이 없었고 그 사이에 노래와 댄스를 외우지 않으면 안됐었지요. 잠을 못 자니 댄스를 외우고 싶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혼자 일본인이었으므로 말도 통하지 않았고,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다는 상황에서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습니다.
Q) 최종 순위는 24위라는 결과였습니다.
켄) 101명으로 시작했으므로, 사실은 "70등까지 갈 수 있으면 됐어"라고 회사와 얘기 했었어요. 그러면 가장 처음의 순위가 21위였어요. 너무 깜짝 놀라서 "아, 더 힘내자. 열심히 하면 정말 앞이 보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죠. 거기에서 더욱 목표를 높이게 되고, 그렇게 하면 저절로 에너지도 점점 솟아올랐어요. 그런것도 있어서, 최종 24위라는 결과까지 가게 된 것인가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성공' ...친구들의 희망이 된 켄타>
Q) 요즘 일본에 돌아오면 옛 친구를 만날 일이 있습니까?
켄) 일본에서 활동할 때의 멤버는, 돌아왔을 때 가끔 만나요. 일본에서 제 공연에 초대하거나, 시간이 나면 밥을 먹으로 가거나 합니다. 그들은 지금 일본에서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다거나, 가수를 하고 있다거나, 이미 보통 일을 하고 있다거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Q) 그때는 어떤 얘기를?
켄) 역시 당시 멤버 중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데뷔 를 했으니 "용기를 줘서 고마워"라거나 "켄타를 보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라고 언제나 말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저도 그 말을 듣고 "더 힘내자" "더욱 더 모두에게 힘을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요.
제 자신이 K-POP에 용기나 꿈을 받은 입장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수가 될 때는 나도 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팬이거나, 가족이거나, 친밀한 사람이거나, 모두에게 꿈을 줄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있다면, 데뷔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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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
https://mdpr.jp/k-enta/1840932
프듀 시즌2에 나와서 지금 JBJ95로 활동중인 일본인 켄타 이야기네요 .
남돌이라 피지알 아재들에게 별 관심 없어보이만 저 밑에 대동경소녀 글 보고 생각나서 퍼왔습니다 .
음악시장이 세계2위인 일본인데 이렇게 케이팝 동경해서 넘어오는 일본인들 보면
아키모토 야스시와 쟈니즈가 일본에서 케이팝의 다크나이트가 아닌가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