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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9/08/14 08:46:24 |
Name |
LiXiangfe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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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 모에 갤러리 |
Subject |
[연예] [AKB48] 고토 모에가 졸업공연을 끝으로 AKB로써의 모든 일정을 마쳤습니다. (수정됨) |
(노리고 찍은거 같은데 왼쪽에 가장 잘보이는 사진이 13기 키타자와 사키인데 한번도 같은 팀을 해본적이 없는 맴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친해진 친구라 많은 분들이 모르셨을것 같다고 모에가 밝히기도 하고 공연에 깜짝 게스트로 나와 '추억의 대부분'을 공연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한국 아이돌의 올팬문화를 상당히 중시여기는 편입니다. 그래서 항상 팀이 잘됬으면 한다고 말했던 나라나 케이를 보면서 기특함을 느끼기도 했고 이러한 올팬문화를 간과했음을 담담히 고백하던 간미연을 보며 쓴웃음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게 뭐 아이돌로써의 데뷔, 그리고 성공이 목표인 한국 아이돌 문화와 연예계 진출의 징검다리로 여겨진 일본 아이돌 문화의 차이점에 기인한다고 말할수도 있지만 AKB 역시도 초반에는 이러한 하코오시(올팬)을 기반으로 컸음은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 사실일겁니다.
프로듀스48의 초창기에도 그렇고 'AKB48'이란 글자를 보며 왜 48명이 아닌거지? 라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48명만이 AKB이던 시절이 있었고 그 48명을 유지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것도 사실입니다. 1기는 팀A, 2기는 팀K, 3기는 팀B로 공연인원 16 X 3 = 48을 만들고 차기 기수들은 졸업하는 인원을 채워나가는 식으로요. 그래서 팀마다 푸쉬가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고 그게 팀의 이미지화 됬으며 세트리스트로 그것이 발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팀K는 '구르는 돌이 되어라'라고 외치고 팀B는 '첫날'에서 스포트라이트를 위해 죽을만큼 춤추고 노래하자고 외쳤죠. 이렇게 쌓인 서사가 맴버가 아닌 팀 하코오시를 만들게 된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운영은 애초부터 팀 하코오시가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다라고 판단했는지 아니면 더 이상 필요없다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들이 이러한 하코오시들을 부수고 내쫓은건 사실입니다. 팀4로 한번, 2014년 대조각으로 막타를 날렸죠. 특히 전 그룹 맴버를 섞어버린 2014년 4월의 대조각은 AKB 하락세의 신호탄으로 여겨졌는데 [여기서부터 2013년에 들어와 6개월도 안된 고토 모에의 아이돌 생활이 시작되게 됩니다.]
애초부터 대조각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각 그룹이 아닌 팀별로 드래프트 맴버들을 뽑았다면 그야말로 드래프트 맴버에겐 빅엿을 날린셈이고 즉흥적으로 나온 기획이였다면 운영의 무능함을 온천하에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즉전감으로 드래프트 맴버들을 뽑았다고 해놓곤 사실방 방치해놓은겁니다. 다행인점은 이 시기의 팀K는 언니맴버들인 요코야마 유이, 키타하라 리에, 시마다 하루카가 리더쉽도 빵빵한데다 후배들을 위하는 마음이 대단하기로 유명한 맴버들이었지만 불행한점은 보고 배울 에이스가 마츠이 쥬리나와 야마모토 사야카였는지라 겸임 맴버라 물리적으로 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내부적으론 대조각으로 뒤숭숭한데다가 외부적으론 악수회 피습사건으로 흉흉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2015년 마치 A/S마냥 AKB내부에서는 조각을 한번 더 단행했고 모에는 이제까지 정들었던 팀K를 떠나 팀B로 이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고토 모에의 장점을 이야기 해보자면 모에는 소위 인싸맴버라 언니맴버들 한테도 서글서글하게 잘 들이대고 후배들한테도 먼저 다가갈줄 안다는 거죠. 그리고 언니들한테 배웠던 점을 후배들한테 가르치고자하는 의지도 충만했다는점도 위의 팀K 맴버와 오오시마 유코에게 배운 유산이었죠. 2013년에 자기 뽑아줘서 고맙다고 졸업할때도 꼭 보고 드리고 싶었다고 2기 맴버인 오오시마에게 연락할 정도면 인싸력 충분한거 아닙니까? 다시 팀B 시절로 돌아가 고토 모에가 커나가야할 시기였습니다. 언니맴버야 두말하면 잔소리인 와타나베 마유, 카시와기 유키가 있었고 또래 맴버인 후쿠오카 세이나, 타츠야 마키호, 야부키 나코등과 함께 공연하며 성장했습니다. 이 시기부턴 불행하기도 슬슬 많은 맴버들이 탈출하던 시기라 다른 팀 맴버들과의 공연이 잦았으나 위의 장점들이 결합하여 많은 친구들을 만들수 있었고 자신 역시 드래프트 1기로 겪었던 어려움을 후의 드래프트 2기, 3기 친구들에게 전파할수 있는 기회를 잡을수 있었으니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할까요? 그랬던 팀B 시절이었습니다.
2018년엔 팀A 이동과 더불어 프로듀스 48에 출연하게 됩니다. 최종순위 24위, 높은 순위임엔 분명하지만 한국에서의 데뷔는 하지 못했고, 최종화까지 못한 이들에까지 푸쉬를 줄만큼 운영이 녹녹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팀A에서 활동은 열심이라 같이 팀A도 되고, 유닛곡 '사랑스러운 악셀'도 부르고 프듀에서 1000%도 같이한 시타오 미우와의 캐미도 나날이 올라가고, 동기가 없어 외로운 15기 무카이치 미온과도 캐미가 증가 하면서 팀A의 버팀목이 된 어느덧 5년, 이제는 중견인 고토 모에의 2018년이었습니다.
2019년 어느덧 고3인 고토 모에에게도 미래를 걱정할 시기입니다. 운영의 푸쉬는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고 본인은 AKB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는 남아있기에 부족하다는 거죠. 다행히도 모델로써의 일이 풀리는 편이라 '아이돌' 고토 모에가 아닌 '모델' 고토 모에로는 비전이 있다고 판단, 자신의 생탄제때 졸업하기에 이릅니다. 팀A 맴버들과 함께한 졸업 공연에서는 자신의 유일한 단독 센터곡 '한 여름의 사건',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키타자와 사키와의 '추억의 대부분' 마지막엔 자신이 아이돌로써 시작할수 있게 도와준 오오시마 유코의 졸업곡 '앞밖에 보지않아'를 공연했습니다. 졸업공연에서 밝힐수 없지만 밝히고 싶은것들이 양손에 가득하다며 앞으로의 고토 모에를 기대해달라고 했으며 그 눈물많던 고토 모에가 몇번 울먹이긴 했지만 울지 않고 씩씩하게 공연을 끝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MC를 봐주던 시타오 미우가 고질적인 뇌정지가 오는 바람에 큰웃을을 주기도 했는데 본인은 너무나 미안했던지 시타오 미우가 울음을 터트리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요.
다음 프로듀스 출연자중 졸업맴버는 NMB48의 나이키 코코로입니다. 그녀 역시 고토 모에와 같은 드래프트 1기생인데 이런 우연히 또 있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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