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출처 :
https://theathletic.com/1208416/2019/09/15/michael-coxs-iconic-teams-of-the-decade-bielsa-nurtures-true-golden-generation-for-chile/
번역 출처 :
https://www.kick-off.co.kr/article/1298 킥오프 치즈돈까스님, 피지알 Yureka님
마이클 콕스의 2010년대 인상깊은 팀 : 비엘사는 칠레의 진짜 황금세대를 길러냈다.
지난 10년 동안 최고 수준의 축구 팀에게는 고강도 압박기반 축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9년 전으로 돌아가보면 월드컵에서 32개 팀들 중 30개 팀은 볼을 빨리 탈취하는데 관심이 없었고 볼을 잃으면 바로 자기 진형으로 돌아가길 바뻤다.
다만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두 팀은 예외였다. 첫 번째는 코어가 바로셀로나 팀 선수 기반이기에 자연스럽게 압박을 가했던 팀 스페인이었다. 두 번째는 칠레다. 이 두 팀은 볼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칠레는 볼을 따자마자 즉시 앞으로 목표를 향해 속도를 내고 달렸다. 반면 스페인은 볼을 달면서는 위협받지 않는 위치로 내려가면서 볼을 유지했다. 이들의 축구 스타일은 그 어떤 다른 팀과도 확실히 차별화되었다. 칠레가 그렇게 축구한 이유는 역시 비엘사의 영향이다.
지금에서야 비엘사라는 이름의 명성이 널리 퍼졌지만, 2002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비극으로 다소 명성이 안 좋았긴 했다. 그의 지도 아래 칠레 축구는 확실히 변했다. 칠레는 1962년 이후로 월드컵 본선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비엘사 아래서 두 번의 승리를 했다. 불운하게도 스페인과 브라질을 상대해야하긴 했지만 말이다.
비엘사는 칠레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그 전에는 지극히 평범하게 수비적이면서도 피지컬적인 남미팀이었지만, 비엘사 아래에서는 톡톡 튀는 축구로 변했다. 비엘사는 미드필더를 컨버팅시켜서 위험할 정도로 바짝 끌어올린 수비라인에다가 넣었고 클라우디오 브라보를 공격적인 스위퍼 키퍼로 사용했다. 미드필더 지역에서 비엘사는 칠레 최고의 인기 선수인 피자로를 빼고 다른 선수들에게 공격적인 맨마킹을 하게 만들었다.
공격에 있어서, 비엘사는 항상 3명의 공격수를 일정 간격에 퍼트렸고 그 뒤에 마티 페르난데즈나, 호르헤 발디바를 no.10으로 사용했다. 아르투로 비달과 알렉시스 산체스가 빅클럽으로 옮기기 전이었기에 비엘사는 팀에 슈퍼스타가 하나도 없는 셈이었지만 이 일을 해냈다. 또한 비엘사는 3-3-1-3과 4-2-1-3 사이에서 계속 변화했다. 이는 상대가 공격수 숫자를 몇 명을 두냐에 따라 달랐다. 비엘사는 항상 후방에 스페어 선수 한 명을 두길 원했다.
정말 짜릿했던 이 칠레 팀은 그럼에도 많은 약점을 가졌다. 그들은 골문 앞에서 너무 골을 날렸는데, 볼 소유를 바로 얻기위해 많이 뛰어다니다보니 정작 문전 앞 상황에서 침착하게 마무리를 하지 못했기 떄문이다. 거기다가 선수 기반 압박은 많은 퇴장과 부상을 야기했고, 높은 수비라인으로 인해서 후방이 취약했으며, 가장 키 큰 수비수가 177cm였기 때문에 세트피스에 취약했다. 비엘사는 이러한 약점들은 자신의 축구에 동반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칠레는 2010 월드컵 16강에서 브라질에게 떨어졌었다. 하지만 이 경기는 그 해 토너먼트에서 전술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경기였다. 칠레의 압박은 브라질의 빠른 공수전환을 통한 역습을 당해내지 못했다. 비엘사는 칠레 FA의 회장이 바뀌고 뒤이어 사임했다. 이 선택은 칠레가 실수를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대체자 클라우디오 보르기는 칠레를 맡아서 많은 팀들이 수비만 일삼던 끔찍한 2011 코파 아메리카 대회를 치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칠레는 여전했다. 상대를 지배했으나 많은 기회를 날리고 세트피스에서 골을 먹히며, 선수들은 퇴장 당했다. 이는 이제 칠레축구의 아이덴티티가 된 것처럼 보였다.
보르기의 후임으로 삼파올리가 뽑히자 이는 확실해졌다. 비엘사로부터 영향 받은 삼파올리는, 2년간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 감독을 맡아서 3회의 리그 우승과 코파 남미 대회를 우승했었다. 그들은 2012년 클럽월드컵을 우승한 코린치안스와 함께 지난 10년간 남아메리카 축구클럽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팀이었고 이는 삼파올리가 국대 감독으로 가게되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난 90년대부터 비엘사를 내 마음 속에 멘토로 삼았다. 그가 내 축구에 전해준 아이디어는 내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삼파올리는 설명했다. 삼파올리의 놀라운 우니 데 칠레 미드필더 듀오였던 찰스 아랑기스와 마르셀로 디아즈는 국대에 퍼스트 초이스였고 아르투르 비달은 전진했다.
이 트리오는 3번의 연속적인 우승을 보이며 축구계를 지배했던 스페인 시대를 종식시켰다. 2014년 월드컵 조별예선에서는 비센테 델 보스케의 스페인을 2:0으로 이겼다. 비달은 부스케츠를 압박했고 아랑기스는 사비 알론소를 압박하면서 아주 거칠고 힘들게 만들었다는 점이 정말 인상 깊었다. 삼파올리는 비엘사보다 이상주의자로서는 약한 모습이지만 전술적으로는 더 유연했다. 가짜 9번을 활용한 4-3-3, 3-4-1-2, 3-5-2를 2014년 월드컵에서 사용했다. 물론 2010년 월드컵 때처럼 칠레는 브라질에게 2번째 라운드에서 떨어졌다. 교체 선수로 나온 마우리시오 피닐라가 슛을 날리면서 패배했다. 삼파올리의 팀은 승부차기 훈련을 게을리한 대가를 톡톡히 치뤘다.
그러나 이 이후 코파 아메리카에서 페널티로 칠레는 두 번이나 우승했다. 2015년 홈에서의 우승할 때는, 우루과이전 공격 대 수비라는 재미있던 경기와, 우니 데 칠레의 또 다른 스타 바르가스가 두골을 넣었던 준결승전 페루전 승리까지 있었다. 비엘사는 3톱을 고집했지만 삼파올리는 산체스와 바르가스, 이 엄청난 활동량을 보여주는 두 명을 투톱으로 사용했고 이 둘을 측면으로 벌리면서 중앙 공간에 다트처럼 침투시켰다. 거기다가 창의적인 No.10, 발디비아는 2015년 칠레 최고의 선수였고 정말 감탄이 나오는 장면들을 연출했다.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은 그야말로 결승전스러웠다. 핏불이라고 불리는 게리 메델은 메시를 묶어버렸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비엘사 그리고 그의 후예였던 삼파올리가 지휘한 칠레가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장애물이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이어진 다음 해 열린 코파 아메리카 100주년 대회는, 칠레에게 있어 기념비적이었다. 그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위협스러웠던 팀들을 토너먼트에서 무너뜨렸다. 또 다른 아르헨티나 사람인 후안 안토니아 피지의 지휘 하에 칠레는 캘리포니아에서 멕시코를 7:0으로 꺾었고 8강에 올랐다. 이 경기는 지난 10년간 정말 인상 깊었던 경기 중 하나다. 산체스는 공격을 이끌면서 놀라운 드리블을 보였다. 하지만 바르가스야말로 4골을 터뜨리며 이 경기의 주인공이었다. 콜롬비아 역시 2:0으로 이겼으며 결승전에서는 다시 페널티킥이 우승을 가렸다. 0:0 상황에서 아르헨티나와 승부차기를 가졌다. 칠레의 공격적인 모습을 생각하면 무승부로 결승전 두 번을 끝낸건 아쉬울 수도 있는 모습이었다.
황금 세대라는 말이 지난 수 년간 남용되고 있지만 칠레에게는 그야말로 딱 맞는 말이었다. 이 때의 칠레는 칠레 역사상 딱 두 번밖에 없는 국제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2015년, 2016년 말이다. 이 세대는 또한 두 명의 칠레 역사상 최고 득점자를 만들었다. 바르가스와 알렉시스 산체스는 각각 38골, 43골을 넣으면서 다른 전설인 90년대 듀오 마르셀로 살라스와 이반 자모라노를 넘어섰다. 칠레 역사상 역대 최고 선수 13명 중에서 12명이 이 세대의 선수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칠레의 성공에 대해서 눈여겨 보여야할 점은 칠레가 압박축구를 하면서 보여준 모습들이 동 시대의 축구 흐름보다 앞선 시대의 흐름을 알아챘다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로써 다른 국가보다 앞서갔고, 눈에 띄지않았던 한 국가가 전세계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2015년, 2016년 메시가 코파 아메리카 결승을 연속으로 올라갔는데 이 세대의 칠레에게 2연벙을 당하는 바람에... 칠레는 참 견실한 팀이었는데 전력에 비해 월드컵에서 돋보이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아쉬울 것 같네요. 물론 우승권 전력 수준은 아니었지만 2010년, 2014년 두 번 다 16강에서 브라질을 만나서 탈락하고 말았었죠. 2018년은 이미 꺾여버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