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실은 지고 못 사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패배 후 그날의 치욕을 하루도 곱씹지 않은 적이 없
었다. 그래서 이왕 업무로 하는 거 이 세계의 1인자가 되기로,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모두를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가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기어오르는 자의 심장을 단숨에 꺼내 다
이스(*dice. 주사위) 신에게 제물로 바친 뒤 발로 뻥 차서 다른 건방진 플레이어들에게 좋은
교훈으로 ……뭐, 말이 그렇단 이야기다. 은실은 징그러운 생김새는 질색이라 SDK(*순대국)
도 선지국도 못 먹고 김밥, 돈가스, 우동, 소시지, 어묵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 꼬꼬마 입맛이
었다.
은실은 그를 데려오기 전 자신이 디앤디 미니어처 원작자 마이클 도네이즈를 초빙해 이틀 간
특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럴 때 대통령의 딸이
라는 사실이 무척 편안하고 위력적인 자리임을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은실이 교양 있게, 진중하게, 상식인답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히히헤헤, 저 덕후남이 왠지 모르게 약간 좋아졌지만 저 덕후남이야말로 날 약올리는 이 짜
증나는 상황에 대표주자 같은 작자이자 교양 없는 작자니까 완전 묵사발을 내야지. 그리고
엣헴 엣헴 하면서 잘난 척하면서 악수하고 “수고하셨어요.” 하고 잔잔히 말해 줄 거야. 그렇
게만 된다면 내 자존심에도 도움이 되고, 사건 해결에도 도움이 되고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
는 게 아니겠어?’
은실이 말했다.
“전 카오틱 굿(*Chaotic Good, 혼돈 선)을 잡겠어요.”
기다렸다는 듯 수성이 대답했다.
“전 그럼 카오틱 이블(*Chaotic evil, 혼돈 악)을 잡겠어요.”
은실은 각자 희한한 재주를 가졌으되 상대적으로 생명력이 약한 유닛이 포진한 진영을, 수성
은 물리 공격력 중심에 개성적이고 생명력도 많지만 리더의 말을 잘 듣지 않고 포악한 유닛이
포진한 진영을 선택한다는 뜻이었다.
“제가 수성 씨보다 경력이 적어서 불리하니까 제가 게임 방식을 정할게요.”
“네, 얼마든지. 그런데 게임 방식을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자신감에 차서 싱글거리던 수성의 얼굴이 은실의 다음 발언에 일그러졌다.
“100점 게임에 랜덤 베이직 시나리오 방식으로 할게요.”
“네?”
디앤디 미니어처는 200점의 운영비용을 사용해 유닛을 고용하는 것이 표준 게임 방식이며,
100점은 플레이를 배우기 위한 일종의 초심자용 간략 구성이어서 웬만한 숙련 플레이어들은
보통 몇 번 하고 말았다. 게다가 고비용 레어 유닛에 개성이 몰린 게임 구성상, 개당 70점 이
상의 게임 유닛 사용 금지 규칙이 있는 100점 게임은 자잘한 유닛들이 저마다 다이스 신의 가
호만 빌면서 각개전투를 벌이는 일종의 투기장이었다. 여기에 추가로 주사위를 굴려 1부터
100퍼센트까지 각기 다른 상황이 주어지는 게 랜덤 베이직 시나리오니, 바꿔 말하자면 고급
유닛 사용법에 빠삭한 수성은 두 날개를 꺾인 채 추락하여, 주사위로 정해진 무작위 시나리
오라는 진흙탕 속에서 날지 못하는 못난이 오리 은실과 확률에 의거한 싸움을 하도록 강요받
은 셈이었다.
“아니, 이 무슨.”
수성의 신음에 은실이 코웃음 쳤다.
“100점 실드 덱(* sealed deck. 포장도 뜯지 않은 박스를 무작위로 사서 안의 내용물만으로
부대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하려다 봐드린 거예요.”
“……대체 누가 이런 거 가르쳐주고 도와주는 거죠? 원인가요 아님 양익 형? 정말 칭찬드리
고 싶을 만큼 치사하군요.”
“칭찬 고마워요.”
“비열 교과서로 쓰고 싶을 만큼.”
“과찬 감사해요.”
“별명을 ‘뽑기 마녀’에서 ‘비열 마녀’로 바꾸자고 건의해야겠어요.”
“원하는 바네요.”
은실은 악명도 명예란 생각에 뿌듯할 뿐이었다. 제작자에게 직접 사사받았다는 생각은 상상
도 못한 채 수성은 투덜거리며 등짐에서 보빈 상자를 두 개 꺼내 그 중 한 개를 그녀에게 내
밀었다.
이어서 수성이 가방 겉면 큰 주머니를 열어 작은 계산기를 꺼내며 물었다.
“저 두 개 있는데 하나 드려요?”
“전 암산 되니까 안 되는 수성 씨 쓰세요.”
“헐.”
마지막 실랑이를 끝낸 두 남녀는 유닛 카드 늘어놓는 소리, 계산기 두들기는 소리, 유닛 카드
에 씌워놓은 보호용 비닐 사각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침묵 속에 적의와 살의를 날카롭게
벼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정신력과 체력, 지력을 다하여 눈앞의 상대를 진정으로 쓰러뜨리고 싶어
했다. 잠시잠깐의 호감과 교감은 잊은 지 오래였다. 한 명은 국립 보드게임 연구원의 신설,
또 한 명은 미니어처 보드게임 마니아 연쇄살인사건에 최적화된 정보원을 확보하려는 장쾌
장절비장한 목적을 가진 만큼 유닛 선별이야말로 용암과 파도가 수증기 속에서 서로를 집어
삼키며 본인의 페이스 안으로 삼켜 버리려는 소리 없는 처절한 사투의 서막이었다. 이는 피
로 피를 씻고, 원한을 원한으로 갚고, 마이 구미 젤리 맛을 포도 맛 마이쮸로 덮는, 한 번 슬
쩍 보기만 해도 전장공포증후군을 앓을 만큼 처절한 인외마경(人外魔境)의 현실이기도 했다.
은실은 감정이입이 지나친 나머지 다른 평행 세계의 자신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한 코퍼 사무
라이를 지휘관으로 삼고 나머지 68점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구 끝에 적이 다가오기
전에 원거리에서 화살을 날리는 콘셉트가 적을 줄이는 데 좋다고 확신했다. 해서 운영비용 2
3점인 하플링 레인저와 운영비용 15점인 그레이클록 레인저를 가장 먼저 넣었다. 하플링 레
인저는 무려 어택 굴림 +12에 마법 대미지 5점을 두 번, 그레이클록 레인저 역시 +10 공격에
보통 대미지를 두 번 주는 강자들이었다. 이 정도 공격 굴림에 20면체를 굴려 나온 수를 더한
다면 원래 방어력이 낮은 CE의 특성상 매번 모든 공격을 고스란히 맞고 와야 할 수 있었다.
각자의 특징도 선명했다. 하플링 레인저는 평소에는 적이 숨어 있어서 받는 방어력 +4를 무
시하고 화살을 날릴 수 있는 능력과 스카웃이라고 해서 다른 유닛들은 스타트 타일에 있을
때 적 스타트 타일을 제외한 모든 타일 중 하나를 골라 미리 놔둘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즉
적이 숨어서 머리를 빼꼼 내밀어도, 화살을 안 맞을 자리를 골라도 미리 잠복해 있다가 신나
게 날릴 수 있는 CG의 재간둥이였다.
그레이클록 레인저는 늑대 한 마리를 거느릴 수 있어 궁수의 악몽인 접근전에서 궁수를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여기에 이들을 강화시키려고 공격굴림+1을 줄 수 있고
무제한으로 마법 미사일을 날릴 수 있는 하플링 위저드, 치료도 가능하면서 항시 노래를 불
러 여섯 칸 안의 적 지휘관의 지휘를 무효화시킬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데비스, 하프엘프 바
드, 남는 5점으로 늑대 한 마리가 더 선택되었다.
‘히히헤헤! 조타!’
은실이 필승의 단꿈을 꿀 때 수성은 악마의 혈통이 섞인 인간 티플링 캡틴을 지휘관으로 선
택하고 코퍼 사무라이보다 방어력은 2 낮지만 레벨도, 스피드도, HP도, 공격력도 모두 센 운
영비용 40점의 레드 사무라이를 주공으로 선택했다. 조공으로는 사대원소에 포함되는 각종
공격에 저항력이 10점이나 있는 어비설 에비스레이터와 몸에서 냄새를 풍겨 붙어 있는 적에
게 공격력과 방어력, 저항력을 -2나 깎아먹는 파충류 인간 트로글로다이트, 마지막으로 3점
남은 운영비용으로 오크 워리어를 선택했다.
즉 수성은 공격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조공들이 일차로 노출되어 적의 포화를 집중시키고
혼란을 일으키며 접근전을 강요하고, 이차로 공격력이 강한 주공이 약해진 적을 때려눕히는
형태로 기획하였다.
*
수성은 원형 탁자의 꽃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투기장인 1.5센티미터 곱하기 1.5센티 격자가 가득한, 맵이라 부르는 1미터 남짓한 회색 빛
종이 지도 위에 타일이라고 부르는 지형지물 종이 8개가 놓였다. 보통은 공간 문제 때문에 잘
해 봐야 7개가 놓이는데 은실이 잔해 지형과 끈적 버섯 지형을 선택해 화살은 맞기 쉬우면서
도 이동력은 두 배로 걸리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쌍방 가장 거리가 먼 대각선 방향의 스타트 존 타일 위에 서로의 전투 유닛을 놓은 전장 위로,
토너먼트 시작 전 예의가 행해졌다. 수성과 은실은 마치 상대방의 손이 독사의 독니라도 되는
양, 근접신관이 노출된 폭약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잡고 아주 살짝 흔들었다.
“지형 선택까지 만만치 않으시네요.”
“고마워요.”
이제 선제 공격권을 누가 갖느냐가 관건이었다. 코퍼 사무라이는 지휘관 점수가 2밖에 안 되
는 반면 티플링 캡틴은 4나 되었다. 은실 입장에서는 끈적 버섯 지형 뒤에 하플링 레인저가 잠
복해서 일단 선제로 맘 놓고 치려면 이기는 게 편했다.
은실은 마이클이 2차로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그는 아주 우연히 이웃의 사촌의 친구의 조카
가 한국인이어서 약간 서툰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우리 미쿡 덕후 살람 다이스 던지는 방법 연구한다 해. 20면체를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
크리티컬인 20이 뜰 때까지 던지는 연습을 10년쯤 하면 자기만의 노하우가 자연스레 생긴다
해. 대통령 전용기도 보내줬고 맛난 것도 많이 줬으니 내 특별히 1973년부터 던전앤드드래건
클래식을 하면서 생긴 노하우를 전수하겠다 해. 첫 번째, 던지기 전 많이 흔들어야 한다 해.
손에서 많이 흔들지 않고 던지면 바닥이 딱딱하면 모르지만 부드러운 종이라면 손에서 시작
된 그대로 떨어져 멈춘다 해. 그런데 이러면 보통 처음 쥔 그대로의 수가 나오는데 15부터 20
의 구간이 최고로 좋고, 10부터 15까지가 회색지대, 1부터 10까지가 적색 지대인 게임 디자인
특색상 이롭지 않거나 그저 그렇거나 나쁜 숫자가 나올 확률이 무려 75퍼센트인 셈이다 해.
두 번째, 극도로 미세한 차이지만 다이스가 많이 굴러간다면 무게 중심이 무거운 쪽이 아래로
가는데 20면체 중 1부터 9까지는 음각으로 숫자 하나만 파여서 나머지 플라스틱이 차지하는
무게가 상당한 반면 10부터 20까지는 두 개의 숫자가 파였기 때문에 세게 굴릴 때마다 면의
무게가 가벼운 높은 숫자들이 위에 올라가는 일, 다시 말해 20면체를 굴렸을 때 높아서 강한
숫자를 얻을 수 있다는 일종의 꿩쯔 님 말씀이다 해.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 점심으로 짜장면 시켜줬음 좋겠다 해. 하는 김에 빼갈 한 병에 라조
기까지 추가해 주면 우리 미쿡 살람 한꿔런에게 띵호와, 띵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