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실은 급작스레 치미는 식욕에 침을 삼키며 손 속에서 주사위를 세게 돌린 뒤 힘차게 내려놓
았다. 1이 나왔다. 어떻게 따져도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사상최악이었다.
수성이 웃자 잠시 멍한 표정이던 은실이 물속에 빠졌다가 가느다란 밧줄을 잡은 사람마냥 필
사적으로 외쳤다.
“잠깐, 잠깐. 우리 랜덤 시나리오 안 정했잖아요. 그것부터 정해야 해요. 이건 무효예요.”
“네?!”
“100면체 굴려요. 제가 굴릴까요?”
“아스 님.”
수성은 엄한 목소리를 냈다가 은실이 눈을 크게, 동그랗게 뜨고 두 손을 꽃받침 자세로 하면서
바라보는 통에 뒷말을 삼켜야 했다.
“한 번만 봐줘요.”
“왜, 왜 이래요.”
“한 번만.”
그 상태에서 은실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수성은 그녀의 긴 속눈썹과 깊은 눈, 건강한 볼,
새하얀 피부, 적당히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새삼 인식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야에 들어왔던
광경은 다 사라지고, 그녀의 따뜻하고 촉촉한 숨결만 느껴졌다. 평생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는 수성에게 이는 격투 게임에서 생명력이 딱 한 칸 남았을 때 맞는 필살기와도 같았다.
“……딱 한 번만이에요.”
“야호!”
예상대로 꼼수가 먹혔다. 국정원을 동원해 수성을 완벽히 연구한 은실의 승리였다. 내친 김에
100면체도 은실이 굴리기로 했다. 수성은 이상스레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국립 보드게
임연구원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10부터 00이 적힌 10면체 주사위 한 개와, 1부터 10이 적힌 10면체 주사위 한 개가 탁자를 구
르더니 98이란 숫자를 토했다.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
“뱀피릭 카타콤?”
흡혈 지하묘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처음 1회 적을 죽인 유닛은 공격 굴림과 저항 굴림에 +1,
접근전과 원거리전 대미지에 각각 +5의 혜택을 받는 시나리오가 떴다. 이는 먼저 죽이는 사람
이 이득을 크게 본다는 소리였다.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은실은 기뻐하고, 수성은 좀 더 생각
이 많아지는 듯했다.
*
워밴드 리더로 선택한 코퍼 사무라이에 완벽히 동화된 은실은 전장인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이
곳은 뭔가 잘못되고 뒤틀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 던전에서 느꼈던 탁한 공기와 그 속에
잔뜩 먼지가 섞인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한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이곳은 사형터를 연상케 했
다. 한두 건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처형과 학살을 일삼는 자들의 소굴이자, 반항할 수 없던 희생
자들의 원령이 원한과 함께 벽 곳곳에 새겨져 있는 느낌이었다.
악의 어린 냉기가 몸 깊이 들어오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면서 은실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른쪽 벽은 안을 선반처럼 깊게 파서 그 안에
두개골을 포함한 유골들을 추려놓았던 것이다. 파인 곳에 피라미드형으로 쌓인 유골들은 대충
백여 구쯤으로, 어두침침한 조명 속에서 눈에 닿는 것만 400여 구였다.
은실은, 그러니까 코퍼 사무라이는 무엇에 홀린 듯 해골들을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살이 썩어서 없어진 해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갓 살해당한 듯한 희생자의 사체가 옆의
해골들과 같은 방식으로 놓여 있었으나 살과 장기의 체적 때문에 봉긋 솟아올라 가뜩이나 불안
정한 뼈 피라미드에 피를 묻히며 구멍에서 허물어져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인 던전 주인에 대한 분노와 공포가 어우러진 가운데, 저 멀리서 그녀를 부르
는 소리가 있었다.
“두목.”
한가운데 버섯밭으로 열린 공지, 그 앞에 보통 성인 키만 한 벽 사이에서 나는 목소리였다.
“여기요, 여기.”
어두운 구석에서 천이 펄럭이더니 머리를 길러 뒤로 묶고 갑옷 차림에 본인 키만 한 활과 검을
찬, 키 작은 남자가 나타났다. 본인의 망토로 몸을 감싸 일종의 위장을 해서 은실은 쉽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자가 사전에 들어온 공격의 핵심, 궁수 하플링 레인저였다.
그의 눈에서 순간 보라색 빛이 났다. 불길하고 악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던전의 영향일 것이다.
다행히 일시적인 현상인지 생각이 깊고 열정이 있어 보이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간신히 표정관리에 성공한 코퍼 사무라이 은실이 물었다.
“적은?”
“아직 보이지 않네요.”
당연한 일이었다. 노출되면 초반부터 화살을 맞으니까 아무래도 입장한 입구 벽에 잔뜩 붙어
상대 워밴드 리더의 돌격 신호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긴 은실에게 하플링 레인저가 말했다.
“저희가 열심히 하겠지만 가급적 선제권을 잡아야 합니다, 두목. 그래야 기다려 쏘든, 이동해
서 쏘든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잘 아시죠?”
은실은 대답 대신 가볍게 신음했다. 승리를 확보하기 위해 내키진 않았지만 준비한 속임수를
쓸 때가 된 것 같았다. 이기려면 뭐든지 해야 했다. 사실 아까 마음에도 없는 애교를 떨었을 때
부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은실의 마음 한구석에서 그녀와 같지만 킥킥거리며 좀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물었다.
‘근데 진짜 마음에도 없는 애교였어?’
은실은 불에 닿은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또 다른 자신이 던진 생각도 못한 짓궂은 물음에 은
실은 할 말을 잃었다. 선뜻 반박을 하지 못하겠다는 점이 좀 더 충격적이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주의를 돌리고 싶을 때 마침 머리 위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소리가 은실을 연거푸 불렀다.
*
“아스 님.”
“네.”
“또 감정이입하셨죠?”
그녀가 상상력이 뛰어나 잘 만들었거나 재미난 세계에 곧잘 빠지며, 한번 빠지면 계속 그런 상
상과 몰입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전번 디앤디 미니어처 게임을 하면서 안 수성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직 선제권 굴림도 하지 않았는데 코퍼 사무라이 유닛 들고 마치 인형놀이 하는 것처럼 하플
링 레인저한테 다가가서 놓고 뚫어져라 쳐다봐서요.”
은실은 우물쭈물하다가 궁색한 변명을 댔다.
“아니거든요. 그냥 하플링 레인저 유닛이 작아서 신기해서 두 유닛끼리 서로 키 비교해 본 거거
든요.”
“그렇다 칩시다. 선제권 굴리자고요.”
“……네.”
은실은 오른손으로 주사위를 잡고는 탁자 쪽으로 슬쩍 끌어다 왼손에 던져 치우고는, 오른손 블
라우스 소매에 숨겨진 작은 주머니에서 이때를 준비해 마련한 주사위를 꺼내 바꿔치기에 성공했
다.
은실이 바꾼 주사위는 비공인 주사위였다. 비공인 주사위는 20면체를 반으로 즉 위아래로 나누
었을 때 한쪽에만 높은 숫자를 몰아놓아 도 아니면 모처럼 10부터 20이 나올 확률을 1/2로 높인
물건이었다. 따라서 굴리는 방법도 공인 주사위와는 달랐다.
은실은 높은 숫자가 모인 면을 위로 쥐고, 최대한 손 안에서 덜 굴린 다음 많이 굴러가서 뒤집히
지 않도록 아주 살살 내려놓았다.
“노력”의 결과 17이 나왔다. 지휘관 능력이 2이므로 합치면 19였다.
“아싸!”
수성이 절망으로 신음하는 사이, 은실은 환호하면서도 그가 속임수를 알아챌까 봐 얼른 주사위
를 잡아 손에 숨겼다.
“선제권 중요한데.”
“중요하죠. 큰일이네요.”
여유 있는 기분으로 은실은 수성이 던져 탁자 위에서 구르는 그의 주사위를 바라보았다. 20면체가
아니라 공인 것처럼 열심히 구르던 주사위는 정확히 가장 높은 수인 20을 보이고 멈추었다. 20 더
하기 4는 24. 그가 선제권을 가져갔다.
수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효했다.
“예스! 예스! 예쓰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