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과 은실은 어떻게 만났냐는 질문에 사실대로 말하려면 한마디로 요약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는 커플이었다. 각계각층의 반대와 짜증을 무릅쓰고 맺어진 두 사람은 매우 낭만적
인 데이트를 일삼았다.
“사격장요?”
“네, 사격장.”
첫 데이트에 섬광과 굉음을 곁들이자는 은실의 제안에 밀덕인 수성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냉큼 받아들였다. 관광객으로 오인해 일본어로 접대하는 종업원을 거쳐 수성은 45구경 콜트,
은실은 파괴력과 반동이 월등한 357 매그넘 데저트 이글을 선택했다. 사격 후 수성이 약간은
엉망이지만 머리에 모인 표적지를 자랑하자, 은실은 씩 웃으며 대못으로 뚫은 것 같은 구멍
으로 정교한 하트 모양을 만든 표적지로 맞대응했다.
대망의 집 데이트 현장, 수성의 옥탑 방에서 은실은 녹색 공룡 잠옷을 입었다.
“캬오, 캬오.”
워해머 플레임 템플릿(*워해머 미니어처어 보드 게임에서 화염 방사기 등의 장비 공격 시 사
용하는 판정 틀.)을 입 주변에서 흔드는 은실을 수성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으앙, 귀요미.’
“캬오, 캬오.”
은실 괴수는 수성이 말리기도 전에 세팅해 놓았던 베인 블레이드 탱크 한 대와 리만 러스 탱
크 세 대, 키메라 보병 수송차 두 대를 밟아서 부수며 전진했다.
“캬오, 음란마귀괴수의 부하를 해치웠다.”
수성이 얼어붙었다.
건물이랑 희한한 잠옷 자랑하는 척하면서 코스프레 플레이를 엮어 어찌 저찌 스킨십을 진행
하려던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이 들켰던 것이다. “음란마귀괴수의 부하”를 완파한 괴수 앞에
는 이제 수성이 3년 동안 디오라마 기술을 이용해 만든 미니어처 보드게임용 지형들이 얼추
시가지 형태를 갖춰 놓여 있었다.
기습당한 수성의 마음에서는 차량의 부품이 튀는 만큼의 반성과 후회가 솟구쳤다. 수성은 눈
물을 삼키며 몸을 둥글게 말아 은실의 발차기에서 지형을 방어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으아앙, 무서운 귀요미. 으아아아앙.’
수성과 은실이 처음 손을 잡은 것은 한강이었다. 인간 세상이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
많은 것을 봐왔을 태양이 수성과 은실의 사랑을 관전하며 지평선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는
중이었다.
수성이 엄청나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걱정하는 동안 은실은 천천히 그의 어
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번째 집 데이트는 보드 게임 플레이였다. <반지의 제왕-대립>이라는 이름의 이 2인용 보
드 게임은 이름대로 소설과 같은 테마를 가지고 있었다. 게임은 쌍방 아홉 개밖에 안 되는 말
과 아홉 장밖에 안 되는 카드를 이용해 선의 세력은 프로도를 상대방 맨 마지막 칸인 모르도
르에, 악의 세력은 프로도를 죽이거나 호빗 동네 샤이어에 아무나 들어가면 이길 수 있었다.
은실은 초보 치고 만만치 않았다. 룰이 간단하거니와 그녀도 수성처럼 영화와 소설의 팬이었
기에 모리아 광산에서 발로그가 진을 치고 있으면 선의 편은 누구 하나 죽는다든지, 김리는
오크를 즉사시킬 수 있다든지 등의 원작을 반영한 유닛 간 상성을 쉽게 이해한 까닭이었다.
첫 판을 선의 편을 잡고 근소한 차이로 아쉽게 진 은실이 새로 악의 편을 잡으며 제안했다.
“그냥 하니까 좀 밋밋해요. 우리 내기해요.”
“그래요. 뭐할까요.”
은실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소원 들어주기? 와, 말하자마자 눈빛 음흉해지는 것 봐.”
“아뇨, 아뇨. 승리를 결심하고 빛나는 것뿐이에요.”
“승리 끝에 어마어마한 소원을 생각하는 눈치인데요? 좋아요. 이번 판도 이길 순 없을 테니
까.”
수성은 속으로 아무리 그래도 내가 오래 했는데 그럴 리 있겠나 싶어 좋아하면서 애써 표정
관리를 했지만 결국 은실의 장담대로 되었다. 특수 카드를 제외하면 서로 높은 숫자를 내고
이를 유닛 고유의 세기와 더한 수가 높은 사람이 이기는 일종의 심리전 카드 게임에서 은실은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레골라스, 아라고른, 갠달프 등 전투력이 강한 유닛이 팍팍 죽어나가는
통에 뻥 뚫린 진영에 두부로 송곳 찌르듯 악의 유닛들이 파고들었다.
수성은 이번에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표정에 따른 약간 어두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졌어요. 잘하시네요.”
“울어요?”
“네? 뭔 소리예요.”
은실이 쿡쿡 웃었다.
“농담, 농담. 제 소원은 말이죠. 얼핏 보니 옥탑방 바깥에 텃밭이 있던데 그거 수성 씨 거
아니죠. 부모님 거죠.”
“어떻게 알았죠?”
“덕후들은 운동이면 모를까 육체노동은 안 좋아하잖아요. 거기 방울토마토가 꽤 튼실하
고 좋아 보이던데 묘종 하나를 포장해 줄 수 있어요?”
“키우게요?”
“네.”
“그래요 그럼 있다가……”
“아뇨, 아뇨. 이건 제 소원이고 엄연한 벌칙이니까 지금 당장 나가서 뿌리 안 다치게 파서
비닐에 잘 싸서주세요.”
수성은 투덜거리면서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모종삽을 찾아서는 밖으로 나갔
다 돌아왔다.
옥탑방 안에 어느새 경찰 정복을 갖춰 입은 은실이 약간 수줍은 태도로 서 있었다. 신발 빼
고 정모에 어깨에 예장이라는 금색 장식과 왼쪽 가슴에 조그마한 훈장 같은 약장까지 전부
갖춘 차림이었다.
수성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면서 눈앞의 그녀가 작고, 값지고, 예쁘고, 빛나는 검은 진
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꽤 구체적인 생각과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야말로 파편
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아니, 이런.”
“싫어요?”
“아뇨, 아뇨. 좋아요. 체포해 주세요. 전 나쁜 놈이에요.”
그녀가 쿡쿡 웃으며 먼저 눈을 감고 수성에게 다가왔다.
*
200석 되는 극장에는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영화에 푹 빠져 대사가 나올 때
는 씹기를 멈췄다가 긴장이 좀 풀리는 장면에서 허겁지겁 입 속에 카라멜 팝콘을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은막 가득 따뜻한 오렌지 색 불빛이 번뜩여 수성과 은실의 얼굴을 훑었다. 영화 속 배우가 말
했다.
“미안하다. 일단 너 내려야겠다.”
“아저씨!”
“둘 다 머리를 식혀야 할 것 같아. 내리는 게 최상책이다. 그리고 기호라고 했나?”
“네.”
“여기에서 준비도 안 해 주고 내리게 하면 얘는 그냥 죽어. 아무리 화가 나도 그중에 네 마음
에 남아서 괴로울 거야. 그래서 내가 은신처를 알려줬어. 이해해라?”
“그러거나 말거나 죽…….”
“스포츠, 내려. 얼른.”
은실이 고개를 기울여 수성에게 속삭였다.
“오빠는 스포츠머리랑 이미지가 좀 비슷한 것 같아.”
수성은 뜨악한 얼굴로 뒤로 몸을 기울여 은실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렇게 나쁜 사람이란 말이야?”
“응.”
“나쁜 마초?”
“응.”
“인간쓰레기?”
“응.”
“……넌 기호 닮았어.”
은실이 웃었다.
“오빠, 막 던진다. 저 뚱땡이는 못해도 130은 나가 보이는데.”
수성은 연이어 막말을 하려다가 은실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빠지고 말았다. 당연히 이렇게 예
쁜 여자 친구와 오덕에다 잘 안 씻고 살로 만든 탑처럼 버르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영화 속 인
물이 닮았을 리 없었다.
수성은 진담 반 장난 반 입술을 내밀어 천천히 은실에게 다가갔다. 은실도 이에 호응해 똑같
이 행동했다.
“명함의 장소를 찾아가. 믿을 만한 곳이야. 사흘쯤 뒤에 데리러 갈게. 전화 어디로 절대 하지
말고, 그냥 숨어 있어라. 알았지?”
화면 속에서 사이드 슬라이드 도어가 닫히고 스타렉스가 떠났다. 그리고 빛이 이룬 밤 속의
레이어 케이크에 합류했다. 곧 케이크는 미식가가 삼킨 것처럼 저쪽 도시 어딘가로 종적을
감췄다. 충격을 받은 스포츠머리가 10차선 도로 위에서 멍하니 서 있든 말든 화면의 빛을 받
은 두 사람의 실루엣이 입술을 기점으로 맞닿기 직전 그 사이로 하나의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약간은 서툰, 외국인이 하는 한국어로 그림자가 이죽거렸다.
“둘이 신났어, 아주.”
왼쪽 뺨엔 수성, 오른쪽 뺨엔 자신의 키스를 받고서 장난스레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여자에
게 놀라 은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
은실이 보기에 눈앞의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갓 내린 눈처럼 정갈하고 굉장히 밝은 톤
의 피부에 긴 검은 생머리로, 분명 동양인인데 서구적인 느낌을 풍기는 이십대 초반의 여자
였다.
그런데 눈이 이상했다.
그녀는 검은색이 아니라 녹색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눈동자도 희한해 고양이나 사자가 그
러는 것처럼 어둠속 빛을 그러모으기 위해 초승달 같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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