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합니다.”
대화 도중 끼어든 스탭은 수성의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그의 이름과 대전 상대의 이름이 적힌
푯말이 서 있는 긴 탁자로 안내했다.
탁자 중간에 앉아 있던 외국인 심판은 예선전 256강부터 64강까지 거쳐 온 실력자 수성을 존
중하는 의미에서 정중한 목례를 해 왔다. 안내 스탭이 떠나기 전 수성은 은실이 옆에 앉아 있
어도 되냐고 물었고, 훈수만 두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상대의 판단이에요. 상대가 심판에게 항의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 주
세요.”
허나 32강 경기를 치르기 위해 주위 탁자에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들어차는 동안에도 상대
는 나타나지 않았다.
은실은 심판 쪽에 가까이 놓인 초시계, 음료수, 게임용 종이 지형 묶음 등의 물품 속에 우뚝
솟은 단어장 크기의 푯말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미즈 X? 상대 플레이어 닉네임이 왜 이래."
수성이 말했다.
“수사진에서도 이번 살인범을 X라고 부르던데 혹시?”
“에이, 말도 안 돼. 그냥 일반적이고 감각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겠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은실은 혹시 모르니 대면 후 배경 조사를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윽고 32강 토너먼트 경기장에 수성의 탁자만 제외하고 모든 플레이어가 착석했다. 웬만한
재벌집 식탁처럼 건너편까지 손도 안 닿는, 엄청나게 긴 탁자가 유독 껄끄럽게 느껴졌다. 9센
티미터 크기의 미니어처 유닛들을 잘해 봐야 쌍방 열 개씩 스무 개 정도 늘어놓는 게임에서
이런 탁자가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다. 수성이 투덜거리는 동안 낮은 울타리 너머로 리틀 워
즈 시연회장에서 군담 미니어처 토너먼트 회장 쪽으로 다가오는 대량의 인파가 보였다. 회장
에서 저렇게 많은 인파를 끌고 다닐 사람은 대통령, 게리 가이각스, 스티브 잭슨 세 사람뿐이
었다.
의문은 금세 풀렸다.
“어라, 엄마가 왜?”
은실의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듯 회장 입구에서 스탭과 만나 이야기하던 대한민국의 여성
대통령이자 정은실의 엄마인 김연수가 눈을 찡긋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구경꾼들이 가지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나 핸드폰으로 현장을 찍기 시작했
다. 하나둘 터지던 플래시는 두 사람의 탁자로 오는 동안 갈수록 거세졌고 결국 그녀가 수성
건너편에 앉자 절정에 달했다. 동시에 일국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보드게임 토너먼트에 참
여한다는 파격에 설마 설마 하던 주위의 덕후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심판도 싱글벙글하며 자
리에서 일어서서 악수를 청하거나 박수를 쳤다.
수성은 그 시끄러운 소리에 대통령에게 악을 써야만 했다.
“어머님이 미즈 X신가요?"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호는 약간 줄어들었으나 빛은 더 늘었다. 플래시 세례를 받아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형상이 점멸하는 엄마가 군중들에게 한 손을 들어 답례하였다. 답례가
끝나기를 기다려 은실이 물었다.
“대체 왜? 왜 참가한 거야.”
“비밀이야.”
“얼씨구, 뭘 꾸미는 거야. 예선은?”
“당연히 면제받았지.”
“……전형적인 권력 오남용이네.”
하마터면 고개를 끄덕여 찬성할 뻔한 수성의 마음을 안다는 듯 대통령이 웃었다.
“그래? 대신 이런 선물을 준비했는데.”
처음 들어오면서 만났던 스탭에게 대통령이 손짓했고, 스탭은 무전기를 써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곧 줄어든 환호가 다시 달궈졌다. 이번 근원지는 회장 반대편이었다. 환호의 정체는 서른두 대의
카트였다. 각 카트에는 척 봐도 30센티가 넘어 보이는 로봇들과 그보다 높거나 작은 지형들이 놓
여 있었다.
수성이 보자마자 열광하며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대단해! HQUC잖아!”
“그, 그래?”
은실은 같이 웃으면서도 대체 무슨 소리인지 뭔지 궁금했다. 군담을 잘 몰라 생기는 궁금증이었
다.
은실이 귓속말로 묻자, 잔뜩 흥분한 수성이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군담 프라모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지금 오는 HQUC가 가장 품질도 좋고, 내부 재현은
기본이고, 관절 가동률도 최고인 물건이야. 군담 로봇이 애니메이션에서는 평균 20미터거든? 지
금 미니어처 게임용은 1대400의 축적으로 줄여서 겨우 9센티미터야. 그런데 저건 아예 1대144
니까 정말 제대로 놀 만한 물건이지. 봐봐. 지형도 1대144에 맞춰서 엄청 크잖아. 저 모형 건물
좀 봐. 건물 위에 헬기 착륙장도 달려 있어!”
“그, 그렇구나.”
‘이해는 전혀 안 가지만 어쨌든 이걸 알고 지시했다면 엄마도 꽤나 연구한 거네. 왜 그렇게까지
했지?’
알 듯 말 듯한 그녀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카트는 담당 탁자 앞에 선 뒤, 플레이어를 확인하
고 그 플레이어에게 로봇 더미를 내밀었다. 수성을 포함해 이를 받아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싱글
벙글하였다. 미리 구성해서 등록한 덱과 같고 사이즈만 더 큰 로봇을 받는 듯했다.
은실은 엄마의 덱을 살펴보았다. 머리에 뿔 같은 것이 달린 붉은색 로봇을 중심으로 붉은색 로봇
과 비슷하지만 카키 그린 색깔의 로봇들 다섯 대와 다리가 없고 탱크 몸체가 달린 사막색 로봇 한
대 해서 총 일곱 대로 구성된 덱이었다.
은실은 입구에서 본 잭을 떠올리며 엄마가 선택한 진영이 자이언임을 알아차렸다.
‘흔하지 않은 게 아무래도 귀한 물건이니까 저 빨간 잭에 팀 리더가 타고 있겠네.’
반면에 남자 친구의 덱 진영은 연방이 확실했다. 흉측한 생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방의 로봇들은 하나같이 색깔이 화려했다. 일본 사무라이 투구처럼 머리 부분을 만든 로봇이
주인공인 군담인 듯했다. 그 뒤로 군담 비슷하지만 디테일을 상당히 뭉뚱그려 대충 옮겨놓은 로
봇, 어깨에 포가 달린 빨간 로봇, 다리만 탱크의 무한궤도를 단 파란 로봇, 마지막으로 로봇을 싣
기에 적당히 길쭉한 트레일러 한 대가 포진했다.
은실은 자이언이 군인이라면 연방은 전체적으로 옷을 좀 잘못 맞춘 야구 팀 같은 인상을 풍긴다
고 생각했다. 연방의 로봇은 흰색에 붉거나 푸른색을 칠한 패턴 아니면 완전 푸르거나 완전 붉어
서 어떻게 보면 갓 등산 점퍼를 사서 자랑하고 다니는 등산객 같기도 했다. 설정상 20미터에 이
르는 크기도 크기거니와 저런 화려한 색깔이면 낮 시간대 평지에는 3킬로미터 멀리에서도 보일
것이 분명했다.
‘하긴 뭐 로봇이 진짜 있는 무기도 아닌데 어때.’
깔보는 표정을 지었을까?
수성이 자신에게는 추억이지만 남이 판단할 때는 유치한 장난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했을 때처
럼 제대로 초점을 맞춰 적극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군담이 밀리터리적으로 완전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우주로 나갔을 때 일손이 부족했고, 일
손이 부족하다 보니 인간형태를 해서 성능만 좋으면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쉽게 접근할 수 있
는 작업 기계를 만들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모두가 인간형 병기에 익숙해진데다 여기에 눈으로
관측하는 것 외에 모든 탐지기를 무력화 하고 나중에 설정이 덧붙긴 했지만 활용방법에 따라 동
력원이나 폭발력으로도 쓸 수 있는 리노프스키스키 입자라는 존재가 삼자 모두 접근전에 용이한
병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지.”
“그렇구나.”
“그래서 연방의 색깔이 좀 요란한 거야. 이런 경우 1차대전 복엽기가 싸울 때처럼 대장기는 대장
기임을 확실히 나타내고, 상대와 완전히 다른 색깔이 싸우기에 더 유리해.”
“그렇구나.”
“반면에 가장 먼저 로봇을 실전 배치하는 데, 뛰어난 로봇을 만드는 데 성공한 자이언은 생산력
도 떨어지고 파일럿 배치도 원활하지 않고 지구 바깥에 있는 콜로니에서 지구까지 병력을 데려
오느라 보급선도 길어서 아무래도 위장까지 고려해서 기습전 형태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렇구나.”
“……너 지금 그냥 대충 대충 흘려들으면서 대충 반응하는 거지?”
“좀 그렇구나. 관심이 별로 없구나.”
수성은 절반은 귀엽기도, 절반은 얄밉기도 해서 간질일까 아님 장난삼아 깨물까 고민하다가 건
너편에 여자 친구 어머님이 있는 현 상황에 아쉬움을 남기며 모두 포기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 카트를 끌고 온 스탭은 밑에 깔린 게임판도 크고 질 좋은 것으로 바꾸었다. 플레이
할 유닛 프라모델이 커진 만큼 당연한 처사였다. 흰색 종이에 헥사가 그려져 있던 판은 세 배 정
도로 커진 헥사 고무판으로 탈바꿈했다. 고무판 구석에는 흰색 밴다이 마크가 선명했다.
홀린 것처럼 황홀해 하던 수성의 반응은 지형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흰색 종이 맵 위에 올려놓는
코팅 종이 재질의 원래 지형 대신 축적에 맞는 모형이 헥사 고무판에 하나하나 올라가는 순간 수
성은 제대로 된 말도 못 꺼내고 흐, 하 하는 이상한 감탄사만 연거푸 터뜨렸다. 그저 공식 사용
지형들을 몽땅 꺼내서 판 위에 올려놨을 뿐인데도 존재감이 장난 아니었다. 룰에 따라 제대로 배
치했을 경우 시가지를 누비며 서로에게 총탄을 가하는 장면이 눈앞에서 선명하게 펼쳐질 것이라
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를 알아차린 구경꾼과 플레이어, 심판 들마저 감탄하는 가운데 대통령이 수성 쪽으로 다가와
상체를 기울이더니 말 한마디로 핵폭탄을 던졌다.
“은실아, 네 남자 친구는 비밀이 많은 사람인 거 알아?”
은실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수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거짓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잘 못했고, 무얼
숨기는 데에도 서툰 사람이었다. 대번에 흙빛으로 표정이 바뀌는 남자 친구의 모습을 보고 은실
은 엄마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오빠, 뭐야?”
“아니 별것 아……”
“별 게 아닌데 표정이 그래? 비밀이 뭐야. 나 몰래 이상한 업소 갔어?”
“절대 아냐.”
은실은 질색하는 수성의 표정이 고마우면서도 다음 연타를 날렸다.
“그럼. 바람 폈어?”
“무슨 소리야!”
“그럼 설마.”
‘설마. 말도 안 돼. 이게 사실이면 끝장이야. 정말 나쁜 짓이야. 우리 오빤 그럴 사람이 아니지만
엄마가 비밀이네 뭐네 이런 자리에서 폭로하는 걸 보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어.’
상상만으로 머리가 핑핑 돌고 바로 뛰쳐나가 시원스레 울고 싶은 기분을 꽉 참고 은실이 물었다.
“오빠 나이가 많아서 혹시나 했는데 혹시…… 이혼남이야? 돌싱이었어?”
이번엔 수성은 기본이고 엄마까지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는 안 되겠다 싶은지 끼어들었다.
“얘, 그건 아니야. 막 아무거나 던지고 그래. 놀라지 말고 들어. 사실 고수성은 말이야, 이네디
요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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