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게 아닌데.’
은실은 울상을 지으며 그의 부대가 먼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수성은 계획대로 조공인 오크 워리어와 트로글로다이트를 열두 칸 움직였다. 벽에 찰싹 달라
붙은 두 유닛들은 쏘기도 힘들거니와 쏴도 하나는 3점, 하나는 7점밖에 안 되는 저비용이어
서 굳이 쏘려고 움직여서 준비태세를 흐트러뜨리는 게 오히려 손해였다. 일테면 초보자에게
수성이 일종의 유인책을 던진 것인데 강훈련을 받은 은실은 이를 무시하고 제 할 일에 몰두
했다.
은실의 작전은 유닛수가 더 많은 점을 이용해 주공이 나올 때까지 버티기였다. 주인이 없어
어차피 조종이 불가능한 늑대 한 마리를 스무 칸 달려 잠복 중인 하플링 레인저 옆에 붙인
은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플링 위저드로 옆에 있던 그레이클록 레인저에게 공격 굴림
+1을 줄 수 있는 매직 웨폰 마법을 걸어주었다. 체구가 작은 마법사가 자신 안의 능력을 선
사하는 순간이었다. 마법을 받은 그레이클록 레인저의 활이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는 무지
개 색으로 빛났다. 마법사는 작은 체구만큼 남들보다 2가 부족한 이동력 4로 스타트 타일
밖에 가장 가까이 있던 벽 뒤에 숨었다.
돌아온 수성의 차례 때 드디어 주공이 움직였다. 어비설 에비스레이터가 열두 칸, 레드 사무
라이는 열여섯 칸 움직였다. 하플링 레인저와는 일곱 칸 차이로 버섯밭만 아니었다면 다음
라운드에 무조건 맞는 위치였다.
움직임을 끝낸 수성에게 은실이 약올리듯 말했다.
“티플링 캡틴만 남으셨네요.”
유닛 수가 적어서 자신에게 좀 더 유리한 때 좀 더 유리한 유닛을 쓸 여유가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말이었다. 수성의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얼른 하세요. 다음 라운드 하게.”
1라운드는 쌍방 평이한 이동으로만 끝날 것이라 확신하는 대답에 은실은 속으로 중얼거렸
다.
‘글쎄올시다.’
일견 수성의 예상대로 되는 듯했다. 데비스-하프엘프 바드가 열두 칸을 움직여 하플링 레인
저 네 칸 뒤에 섰다. 그레이클록 레인저는 자신이 거느린 늑대에게 공격력 1을 높여주며 DR
을 무시하게 만드는 기술 매직 팽을 쓰고 여섯 칸, 매직 팽을 받은 늑대는 스무 칸을 그대로
이동해 하플링 레인저 뒤에 바로 붙은 다른 늑대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덕분에 끈적 버섯밭
옆 폐허에 숨어 있던 하플링 레인저는 대형견 두 마리를 거느린 애견가처럼 보였다.
은실이 정중한 태도로 턴을 넘겼다.
“하세요.”
수성은 단 하나 남은 티플링 캡틴을 열두 칸 이동해 모두가 전부 보여 지휘를 할 수 있으면
서 최대한 많이 가는 정석적인 플레이로 턴을 마무리했다.
드디어 마지막 남은 은실의 턴.
처음은 별로 이채롭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코퍼 사무라이는 첫 일곱 칸을 전장 근처로 오는
듯했다. 남은 일곱 칸을 움직일 때 잠시 생각하던 은실은 유닛을 전장 중심, 그러니까 하플링
레인저와 두 마리의 늑대, 바드가 있는 곳이 아니라 대각선 건너편 석벽 안으로 들어가더니
끈적 버섯밭의 거의 끄트머리 부분 쪽에 자리 잡았다.
수성은 처음에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의 유닛이 다 보여서 지휘하는 데는
지장은 없지만 혼자 따로 떨어져 있어서 좋을 것이 없는 게 디앤디 미니어처 게임이었다. 적
이 몰려들어 앞뒤로 포위라도 한다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게임인 것이다. 수수께끼는 바로
풀렸다.
하플링 레인저가 움직였다. 폐허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대각선 방면으로 여섯
칸을 움직였다. 그곳은 끈적 버섯밭 끄트머리이자…….
“여기요. 여기서 레드 사무라이 보이죠?”
그랬다.
아까는 가려져 있었던 레드 사무라이가 은실이 한 번 움직인 것만으로 아주 살짝이나마 몸통
이 드러나 버렸다. 화살 쏘는 실력이 좋아 가려진 것으로도 방어력 +4 규칙을 무시하고 쏠 수
있는 하플링 레인저에게 이 자리를 잡힌 것은 은근히 아팠다.
“그리고 코퍼 사무라이 지휘 범위에 들어요. 하나, 둘, 셋…… 여섯 칸. 맞죠?”
아, 이래서.
“……네.”
“코퍼 사무라이 지휘 효과가 부하가 다이스로만 20이 나오면 그 즉시 같은 종류의 가장 높은
공격 굴림을 가진 공격을 한 번 더 하는 기능인 거 아시죠?”
수성이 그럭저럭 여유를 되찾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히기야 하겠지만 크리티컬이 그
리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레드 사무라이는 HP가 75나 되는 만큼 한 대 정도는
맞고 시작해도 무방했다.
‘하플링 레인저가 잘 맞추긴 하지만 피해를 5점밖에 못 주니까 괜찮아. 할 만해.’
“굴립니다. 굴립니다. 제발, 다이스 신이시여. 20. 20. 나오게 해 주소서. 20. 자, 자. 나왔다!
나왔다! 이거 보이시죠?!”
수성이 눈을 홉떴다. 크리티컬이 나와 버렸다. 20을 확인시킨 은실이 얼른 손 안으로 챙겼다.
피해가 5점에서 두 배로 불어 10점이 되었고, 코퍼 사무라이의 지휘관 효과를 받아 다음 공격
도 그대로 맞아 총 피해는 15점이었다.
첫 라운드의 손실을 곱씹으면서 수성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실이 속임수를 쓰
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보통은 주사위 선택에서 술수를 쓰는데.’
하나하나 되짚어 보자 싶어 수성이 은실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선과 시선이 닿
은 의도를 알아챈 은실이 침을 삼키더니 주머니 속에 있던 리모컨 버튼 중 하나를 꾹 눌렀다.
수성이 들어왔던 쪽 문이 열리더니 난데없이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뭐, 뭐야?”
처음엔 놀라던 수성은 순식간에 환호성을 질렀다. 늑대를 닮았지만 건강함과 귀여움으로 충
만한 검은색과 회색 털이 섞인 시베리안 허스키가 들어왔던 것이다. 허스키는 치다 떨어질
정도로 꼬리를 치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수성과 은실을 번갈아보더니 자신을 처음 봤음에
도 좋아 죽고 못 사는 인간에게로 향했다.
“으, 와, 우오, 너 진짜, 완전, 아니 이렇게.”
허스키는 수성에게 몸통박치기를 걸 듯 안기더니 촉촉이 젖은 코와 긴 빨간 혀로 애교를 부
렸다.
은실은 수성이 개를 껴안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사이, 얼른 비공식 다이스를 주머니에 넣고
똑같은 색깔이지만 공식 다이스로 바꿔치기 했다.
“으헤헤, 귀엽다. 너 끝내준다. 아스 님. 얘 이름 뭐예요?”
“즈베즈다요.”
“즈베즈다! 러시아 이름 아닌가요? 별이란 뜻의.”
“맞아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가열차게 짖어대는 시끄러운 울음소리 속에서 은실은 이 사람이 러시
아 어도 하나 싶어 신기하게 여겨서 물어보려다 또 어디 오덕계열 창작물이나 밀리터리 물
에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해 묻지 않았다.
“러시아 전투기 긴급 탈출석 이름이 즈베즈다예요. 그래서 알게 된 단어죠.”
‘역시.’
“근데 왜 개가 여깄어요? 경비견으로 훈련받은 개인가요?”
“푸틴의 수법(*독일 총리 마르켈이 개 공포증이 있는 것에 착안,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목적
으로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단독 회담 시 회담장에 거대한 개를 풀어놓은 사건이 있다.)을
아, 아니 푸틴이 선물해 준 거예요.”
“오오, 역시 영애는 다르군요. 좋겠다. 이런 선물도 받고.”
수성은 이어서 뭔가 우물우물 부끄러워하면서도 꿈꾸는 듯한 아련한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
렸다.
“나도 만약 양친 중 한 분이 대통령이셨다면 클레이모어(*고대 서양 장검 명), MP-5K기관단
총을 든 게임 캐릭터 춘리(*일본 게임사 Capcom이 만든 격투게임의 출연 캐릭터 중 한 명.)
가 아프렐리아 바이크에 타고 그 뒤를 쫓아오는 시베리안 허스키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겠
죠…….”
‘아니, 절대 그럴 일 없어.’
은실은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지우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자, 즈베즈다랑은 나중에 놀고 게임하죠.”
“그래야죠.”
수성은 아쉬움이 담긴 손길로 개를 쓰다듬고 미리 약속한 대로 문 밖에 있다가 신호를 받으
면 개를 내보내기로 한 요원의 손에 즈베즈다를 인도했다.
“그런데 내가 뭘 생각했더라? 아까 뭘 살펴볼까 싶었는데?”
수성의 중얼거림에 은실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시베리안 허스키? 워해머? 혹시 배고프세요?”
“음, 아뇨. 뭐더라.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뭐 넘어가죠. 다음 라운드 선제권 굴림 해요.”
“네.”
은실은 대답하면서도 수성이 이렇게 허술할 줄 알았으면 비공식 주사위를 한 번 더 써먹을
것을 그랬다고 속으로 후회하였다.
그 모든 술수 속에서도 은실은 선제권 굴림에서 지고 말았다.
수성이 선공이었다.
*
거리낌이나 후회,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강도강간살해방화를 저지를 만한 괴물들이 근처에
서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최악의 고함들은 빈 곳마다 뼈를 가득 채워놓은 던전의
벽들을 마치 울림판 삼아 좀 더 기괴하고, 좀 더 피와 굶주림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커지다
가 버섯이 발 아래 깔려 있는 공터로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비하면 최선두에 장애물은 장애물이되 몸을 가리지 않는 장애물 뒤에 서 있는
하플링 레인저는 뒤에 선 코퍼 사무라이 은실, 같은 편이자 그를 굳게 믿고 있는 지휘관이
보기에도 너무 작고 가냘파 보였다.
끈적 버섯밭 건너편의 어두운 통로가 점차 밝아지더니 이내 벽 안의 해골들을 비춰주는
불빛이 하나의 형상을 발하여 완벽히 모습을 드러냈다. 적의 주공, 레드 사무라이였다.
드래곤의 피를 타고난 인간이니 인간의 얼굴을 해야 마땅할 텐데 자신의 마법검에 맺힌
화염이 비추는 그의 얼굴은 인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드래곤의 해골을 형상
화한 일본식 투구와 갑주 속의 남자는 야차였다. 그것도 왼쪽 어깨받이에 화살을 두 대 맞
고 분노해서 자신을 쏜 놈은 물론 그 무엇이든지 불태우고 두 동강 내서 죽이겠다고 이를
가는 증오에 찬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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